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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포항 1년 살기?

경주 서악동 고분군 - 한적하고 여유롭게 고분 구경하기 - 태종무열왕릉, 서악동 삼층석탑, 진흥왕릉까지 -

by 솔이끼 2024. 3. 12.

 

2024. 3. 3.

경주 서악동 고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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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또 간다.

경주는 가도 가도 갈 곳이 남았다.

국립경주박물관 갔을 때

카페에서 창 서쪽으로 고분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서악동고분이다.

 

먼 곳에서도 보일 정도니 엄청 크겠다.

가봐야 겠다.

 

그러고 일주일

다시 경주 찾았다.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했다.

서악동 고분군 아래에 무열왕릉이 있었다.

서악동은 경주시내에서 떨어져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한적하다.

 

 

무열왕릉 앞에는 무열왕 아들인 김인문 묘가 있고

뒤쪽으로는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입장료 2천원 받는다.

 

 

문으로 들어서니 이런 풍경

소나무 숲, 전각 하나, 왕릉

 

 

전각안에 무열왕릉비 있다.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있다.

거북이가 잘 생겼다.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 국보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이수에는 용이 여의주를 서로 쥐고 있다.

양쪽 3마리씩 총 6마리를 새겼다.

 

 

이수 측면 용 3마리

 

 

거북이 목이 힘차고 사실적이다.

 

 

태종무열왕릉이다.

 

 

경주 무열왕릉 - 慶州 武烈王陵 - 사적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솔 숲 사이 깔끔한 모습이다.

 

 

무열왕릉 뒤편으로 고분군이 있다.

큰 언덕 위에 고분이 있어 웅장하게 보인다.

 

 

언덕선과 어울린 고분 선이 예술이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이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 - 慶州 西岳洞 古墳群 - 사적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이곳의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4개의 고분이 일렬로 서있다.

그런데 서악동 위쪽에 있는 고분들을 보면서

안내와 다른 것을 알았다.

진흥왕릉, 진지왕릉은 따로 있었다.

그럼 안내문은 왜 이렇게 썼을까?

 

 

고분 뒤편으로 올라가 보았다.

멋진 풍경이다.

 

 

제일 마지막 고분

 

 

한바퀴 돌아서 내려온다.

 

 

마을 돌담에 영춘화가 피었다.

봄이다.

 

 

태종무열왕릉을 나와

마을 이정표 따라간다.

어?
진흥왕릉

서악동 고분군 안내판에는 진흥왕릉으로 추정된다고 했는 데?

 

 

 

 

서원인줄 알았는 데 서당이란다.

 

 

도봉서당이다.

아직까지 서당이 남아 있다.

 

 

 

 

도봉서당 - 국가유산자료

도봉서당은 조선 성종 대의 학자였던

불권헌 황정(1426-1497)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5년(중종 1년) 지금의 위치에 추보재라는 묘사재실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이 서당은 숭앙문·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상허당 등 모두 7도이며

일종의 서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배치형식은 재사를 강당 뒤에 둔 전강당 후재사형인데,

이는 경상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강당(도봉서당)은 정면 5칸·옆면 1.5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옆·뒷면에 쪽마루를 둘렀다.

사당(상허당)은 정면 4칸·옆면 1.5칸이며,

중당협실로 구성된 바로 볼때 강당형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재(연어재)는 남쪽과 동쪽면을 모두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여

두 개의 정면을 갖게 한 점이 눈길을 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고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특이한 형태의 삼층석탑 있다.

기단석도 특이하고, 옥개석도 위아래 양쪽으로 단을 만들었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 慶州 西岳洞 三層石塔 - 보물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동 동ㆍ서 삼층석탑(보물)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뒤편으로 고분들이 보인다.

 

 

감실 옆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들어오는 쪽으로는 소나무 숲과 고분

정말 멋진 곳에 자리잡았다.

 

 

삼층석탑 뒤편 이름없는 고분들

 

 

소나무 숲 속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그런대로 멋이 있다.

 

 

서악동 고분군 맞은 편이다.

4개의 고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엄청 크다.

 

 

이곳 풍경 너무 멋지다.

삼층석탑과 고분이 잘 어울렸다.

고분 잔디도 빛이 좋다.

 

 

삼층석탑 주변을 한참 있었다.

너무 멋진 탑이다.

주변 풍경도 멋지다.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뒤편 고분군으로 향한다.

 

 

서악동 바위 구멍 유적이다.

성혈이란다.

 

 

제일 먼저 헌안왕릉이 있다.

왕릉치고는 작은 편이다.

 

경주 헌안왕릉 - 慶州 憲安王陵 - 사적

신라 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의 무덤이다.
헌안왕은 본명이 김의정으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특별한 치적은 없으나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는데 힘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무덤의 형태는 가장 단순한 형식의 무덤으로 높이 4.3m, 지름 15.3m의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 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된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문성왕릉 있다.

 

경주 문성왕릉 - 慶州 文聖王陵 - 사적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였으나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봉분에는 호석이나 상석 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남측에 1기의 표석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로 국가유산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봉분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신라 후대로 갈 수록 왕릉 크기가 작아지나?

 

 

멋진 솔숲 따라 올라간다.

 

 

진지왕릉 나온다.

 

경주 진지왕릉 - 慶州 眞智王陵 - 사적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이며,

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이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진흥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지왕릉은 호석으로 추정되는 괴석의 일부가 봉분에 노출되어 있으며,

봉토 및 주변에는 잔디를 식재하여 토사유실을 방지하고 있다.
봉분 정면에 표석 1기와 국가유산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 남동쪽으로 길이 32m의 석축이 만들어져 있다.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진지왕릉 표식

서악동 고분군을 진지왕릉으로 추정한다고 했는 데

 

 

진지왕릉 뒤편으로 돌아 간다.

 

 

제일 위에 있는 고분이다.

 

 

진흥왕릉 표지석 있다.

 

경주 진흥왕릉 - 慶州 眞興王陵 - 사적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진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된 이 무덤은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신라 왕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며,

기록상 법흥왕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하므로

서악동 무덤들 중 위에서 두 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안내판도 오락가락

결론은 그냥 추정하는 것으로 알아 먹었다.

 

 

진흥왕릉을 마지막으로 서악동 고분들을 둘러보았다.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 큰 고분들과

서악동 삼층석탑 주변에 산재해 있는 작은 고분들

그리고 왕릉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데

알 수 없다는 것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 진흥왕릉의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작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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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3. 경주 서악동 고분들을 보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