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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포항 1년 살기?

국립경주박물관 5. - 옥외 전시장 - 신라 천년의 쇠락을 보다.

by 솔이끼 2024. 3. 6.

 

2024. 2. 25.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 천년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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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전시관은 다 둘러봤다.

이제 옥외 전시장을 돌아보자.

 

 

귀부에 거북이가 두마리다.

나름 멋 부린다고 한 것 같은 데

거북이 두마리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비석은 어디로 가버리고

이수는 깨져 있고

아프다.

 

쌍거북 비석받침 - 雙龜趺​

경주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터에 있었던 비석받침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나 전체적으로는 거북의 모습이며,

등에는 두 겹의 거북등무늬[龜甲文]가 새겨져 있다.

짧은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걸려 있고 등에는 큼직한 비석받침[碑座]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별석의 또 다른 받침이 있다.

비는 일부 편만 확인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석탑 몸돌로 보인다.

사각형 돌에 일부러 부처를 새겨 놓은 것 처럼 보인다.

석탑 부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현대적 조형물 같다.

 

 

일명 에밀레 종이라는 성덕대왕 신종이다.

보는 순간 놀랍다.

성덕대왕신종 - 聖德大王神鍾​(奉德寺鍾)

이 종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만들기 시작하여
그 아들인 혜공왕에 의해 771년에 완성되었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뉴(龍뉴)와 음통(音筒)이,
몸에는 위로부터 보상당초무늬를 새긴 문양띠,
그 아래는 4개의 유곽(乳廓), 4구의 비천상, 2곳의 당좌(撞座),
맨 아래에는 보상당초와 연꽃 문양띠가 양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아름답고 여운이 긴 종소리 등
우리나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종 크기가 365.8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주조기술로 이렇게 큰 종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종에 새긴 비천상

너무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당초문과 연화문으로 종 아래를 둘렀다.

 

 

유곽은 당초문으로 촘촘히 새기고

유두는 튀어나오지 않고 밋밋하다.

화려하면서도 단아안 멋을 준다.

아니 편안한 느낌

 

 

석조다

통돌을 다 파내서 물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길이가 무려 4m 정도 되니 엄청난 공력이 들었겠다.

 

문자새김돌홈통 - 在銘石槽​

박물관 정원에 전시된 대부분의 석조는 모두 길이 2m내외이지만

이 석조는 길이 3.92m나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다.

옆면에는 「天光雲影」이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고

윗면 주연부에는 「二樂堂前…」의 작은 글씨 85자가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모두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모서리기둥이라는 데

참 네쌍이 어디 모서리에 있었는 지?

탑 옥개석 받침이었을까?

 

나한상 모서리기둥 - 羅漢像隅柱石​

경주 읍성을 쌓을 때 근처 절터에서 가져다가 성돌로 썼던 것이

성벽이 무너지면서 발견되었다.

4개의 네모난 돌기둥을 조합시켜 조각된 두 면을 표면으로 사용하였던 구조물의 일부로

표면에는 선 자세의 나한상이 각각 돋을새김 되어 있다.
나한상은 머리를 약간 숙여 공양하고 있는 측면상으로

손잡이가 달린 향로 등을 들고 있다.

연꽃좌대 위에 서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앞코가 살짝 들린 신발의 모습이 석굴암의 나한상과 유사하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석굴암 10대 제자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다.

정말 크다.

 

 

고선사 삼층석탑 - 高仙寺三層石塔
고선사 삼층석탑은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일반형석탑의 시원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러 개의 석재를 짜 맞추어 쌓는 방식을 적용하여
이중의 기단부基壇部와 삼층의 탑신부塔身部를 표현하였다.
1층 탑신석塔身石의 네 면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으며
표면에는 금동판 등을 부착하기 위한 작은 구멍들이 확인된다.
석탑 이전 당시에 3층 탑신석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갖춤은 발견되지 않았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22.5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 멀뚱이 서 있는 모습이 안스럽다.

이 웅장한 삼층석탑도 신라의 쇠락의 길과 같은 길을 걸었다.

있던 곳으로라도 갔으면 좋겠다.

 

 

목이 잘린 돌부처 들이다.

오른쪽에 있는 돌부처는 약사여래다.

 

약사여래 - 石造藥師佛立像

머리가 결실되어 상의 존명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왼손에는 둥근 보주寶珠처럼 생긴 지물持物을 들고 있어 약사불일 가능성이 있다.

몸에 두른 대의大衣는 하반신 아래로 U자형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세부의 조각은 입체적이지만, 괴량감이 강하고 특히 옷을 두껍게 처리하여

신체의 굴곡이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 상이 출토된 장소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 터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는 이곳을 영묘사靈妙寺 터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조각이 잘 되어 있는 석재

어디서 왔는 지 알 수 없다.

석등 조각인지 승탑 일부인 지?

 

 

목잘린 돌부처가 있더니

머리만 있는 부처도 있다.

 

부처얼굴 - 石造佛頭​

1959년 경주 남산의 철와골[鐵瓦谷]에서 발견된 부처의 얼굴조각이다.

머리만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정교하게 조각된 앞면에 비해 뒷면은 대충 다듬었고,

목 뒤를 어디에 기대어 놓을 수 있게 쪼아낸 점으로 보아

처음부터 몸체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민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이마에는 백호를 돋을새김 하였다.

다소 길쭉한 얼굴에는 우아한 곡선의 눈썹과 굳게 다문 입,

그리고 아랫입술과 군살진 턱이 두툼하게 조각되었지만 귀는 표현되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키다리 돌보살 있다.

 

관음보살 - 石造觀音菩薩立像​

경주 낭산 서쪽 기슭에 묻혀있던 것을

1978년과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머리와 몸체를 박물관으로 옮겨와

복원한 관음보살상이다.
몸체의 왼쪽으로 무게를 실어 허리부분에서 살짝 삼곡三曲자세를 보인다.

얼굴과 팔이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게 표현되었으며

하체는 짧은 편이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고 장방형의 얼굴은 양 볼이 풍만하다.

이마에는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백호를 표현하였다.
적절한 신체비례와 유려한 세부 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월지관 뒤로 돌아가니 

매화가 피었다.

 

 

어느새 봄이 왔다.

아직 쌀쌀한 날

신라의 천년은 그렇게 사라지고 유물만 남았다.

박물관에 박제처럼 봉인되어

관광객들에게 호기심만 불어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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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2. 25. 국립경주박물관을 보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