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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포항 1년 살기?

국립경주박물관 2. - 신라역사관 - 신라로의 초대 - 천년 신라를 보다.

by 솔이끼 2024. 3. 5.

 

 

 2024. 2. 25.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하루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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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본격적인 유물 관람을 해보자

 

 

본 건물로 들어서니

벽에 '신라로의 초대' 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너무 멋지다.

초대 받았다.

 

 

팸플릿에 있는 신라역사관 소개

전시실은 4개로 나뉘어져 있고

찾아야 할 보물은 5개

 

 

선사유적부터 보여준다.

 

 

덧댄토기란다.

토기가 예술적이다.

아래 받침이 작고 위는 아주 넓다.

문양을 덧댄게 현대 도자기에 뒤지지 않는다.

 

 

돌칼과 돌화살, 돌도끼 등등

 

 

청동기 무기류다.

 

 

오리모양 토기

오리 표정이 살아있다.

 

 

 

 

새모양 토기

눈이 휑하다.

 

 

 

 

빗살무늬 토기다.

 

 

대충 그은 빗살이 아주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멋진 토기다.

 

 

목걸이?

푸른빛이 너무 좋다.

 

 

곱은옥

모양이 애벌레 같다.

다양한 색을 가진 곱은옥이 멋지다.

 

 

목걸이

색이 예쁘다.

 

 

팸플릿 추천 보물 첫번째

국보로 지정된 토우장식 항아리다.

항아리에 장식된 토우들이 사실적이다.

 

 

토우장식 항아리 - 土偶附長頸壺​

목긴항아리[長頸壺]에

다양한 형상의 토우를 부착하여 최대의 장식효과를 낸

신라의 가장 대표적인 토우장식 토기이다.

항아리의 목과 어깨부분에는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과 오리모양 토우를 세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성기性器가 강조된 남자,

신라금新羅琴을 타고 있는 사람,

성행위 자세의 남녀상, 물고기․새․거북 등의 토우를 장식하였다.

이러한 장식토우들은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조형물로서

신라인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34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팸플릿 추천 보물 두번째

황금보검이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다.

그림으로 볼 때는 아주 크게 보였는 데

 

 

장식보검 - 慶州 鷄林路 寶劍​

경주 계림로 1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는 꼭지가 달린 자루나 칼집에 나무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썩어서 없어졌다.

칼집과 자루에는 얇은 금판을 전면에 입히고,

다시 작은 금판을 세워 붙여 물결·나뭇잎·원·타원·태극무늬 등을 만들어 조합시켰다.

이러한 무늬에는 붉은 마노와 재질을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석의 붉은빛과 잿빛 및 금판의 금빛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36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유리잔

 

유리제잔 - 琉璃製杯​

우리나라에서 유리 제작 기술은

대략 기원 전후한 시점에 도입되어 천하석제 옥과 함게 장신구에 많이 활용되었다.

유리로 만든 그릇은 삼국 중 신라의 왕족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경향이며,

이 또한 신라 지배층의 독특한 장례문화와 연관된다.

유리 제품은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병과 유리잔의 사례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과 중국 등을 거쳐 수입된 것도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입 제품은 봉수병에서 부러진 손잡이를 금실로 감아 보수한 흔적이 있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귀중하게 다루었을 가능성이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파란 유리잔 크기가 7.4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칼과 허리 띠

 

 

 

 

금관부터 신발까지

무덤에 누워있는 형태

죽은 자를 위한 예술이다.

 

 

칼이 매력적이다.

손잡이가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드리개?

 

드리개 - 金垂飾​

드리개는 일반적으로 관 아래에 드리우는 장신구이며,

귀걸이와 형태적으로 비슷하나 긴 것이 다르다.

샛장식의 매듭은 아래위로 고리를 지운 굵은 금실의 겉면에 가는 금실을 촘촘히 덧감아 만들었다.

가는 금실을 덧감을 때 아래위 두 곳에서 십자로 뽑아낸 고리에 달개를 매달았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귀걸이 아래로 내려오는 세밀한 꾸밈이 예술이다.

 

 

치렁치렁

걸고다닐만 하겠다.

 

 

보고만 있어도 좋다.

어떻게 저런 형태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관꾸미개

이름이 특이하다.

 

관꾸미개 - 金冠飾​

관꾸미개는 일반적으로 ‘고깔형태의 관[帽冠]’ 정면에 있는 포켓에 끼워 쓴다.

이 관꾸미개는 힘찬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며,

앞판과 양쪽 날개 세 개를 조합하여 만들었다.

앞판의 윗부분을 비롯하여 양쪽 날개에는 용무늬를 새겼는데,

너무 추상화되어 흡사 덩굴무늬처럼 보인다.

앞면에는 고깔에 끼우는 부위를 제외하고 빼곡하게 달개를 달았으나,

뒷면에는 고깔과 맞닿지 않는 날개의 윗부분에만 달개를 달았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40.8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황금의 나라에 온 것 같다.

 

 

교동금관 - 校洞 金冠​

경주시 교동(校洞)의 폐고분(廢古墳)에서 도굴된 것을 압수한 금관(金冠)으로,

신라 금관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준는 대표적인 예이다.

5세기대 전성기에 해당하는 신라 금관은 둥근 테[臺輪]에 사슴뿔모양 세움장식을 두 군데 배치하고,

나뭇가지모양 장식[出字形立飾]을 3단으로 세운다.

반면 초기 형태에 해당하는 교동 금관은 사슴뿔모양 세움장식이 없고,

나뭇가지모양 장식이 1단에다가 45도 가량 위로 꺽여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가 왕경에서 볼면 지방에 해당하는 부산의 복천동고분에서 출토된 점에 볼 때

지방지배의 수단으로 금관을 활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12.8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팸플릿 추천 보물 세번째

금관

천마총에서 나온 거란다.

 

 

금과 옥으로 이렇게 멋진 관을 만들었다니

그저 놀랍다.

 

금관 - 金冠​

신라 금관의 화려함을 잘 표현한 걸작 중의 하나이다.

신라 금관은 보통 둥근 테[臺輪]에 3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出字形立飾]과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鹿角形立飾]을 세운 뒤,

곱은옥[曲玉]과 달개[瓔珞]로 가득 장식한다.
둥근 테와 세움 장식판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점열무늬[點列文]와 파상무늬[波狀文]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한다.
관을 착용했을 때 양쪽 볼에 해당하는 부위의 둥근 테 지점에는

가는고리[細環]로 코일처럼 길게 꼰 사슬로 만든 드리개[垂下飾]를 매단다.

신라는 지배자의 상징으로 금(동)관을 활용한 결과,

경주의 왕족이 착용한 것은 물론이고

재질과 모양은 달랐지만 지방의 수장도 소유할 수 있었다.
이는 금동관의 하사를 통해

지방의 수장을 회유하고 견제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래서 고총과 화려한 위세품으로 통치기반을 확립해나가던 "마립간" 시기 즉 5세기대에 가장 화려하고,

불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는 6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퇴화한다.

천마총 금관의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이전의 3단에서 4단으로 변한 점이 참조가 된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32.5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허리 장식도 예술

 

허리띠 - 金腰帶​

삼국시대에 과대는 관복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지만,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화려함의 극치이다.

이는 아마도 실용했다기 보다는 장송의례용으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며

신라 지배층의 장례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대는 얇은 금으로 만든 과판 44개와 띠고리, 띠고리 끝장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줄의 요패(腰佩)를 매달았다.

과판 문양은 좌우대칭의 변형 인동무늬[忍冬文]와 이파리무늬[葉文]를 뚫는 것이 일반적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125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기와

 

 

도깨비를 새겼다.

집 지키는 수호신?

 

 

막새

연화문을 새겼다.

 

 

 

 

문무왕비 일부란다.

 

문무왕비 - 文武王碑​

이 비석은 정조(正祖) 20년(1796년) 무렵,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어던 홍양호(洪良浩)가 발견한 2조각 중 하나다.

비석은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 있는 귀부(龜趺)에 서 있었던 것 같으며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681년 또는 이후로 보는 2가지 견해가 있다.

비문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마모(磨耗)가 되어 전문(全文)의 판독은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앞쪽은 신라에 대한 찬양, 신라 김씨의 내력,

무열왕(武烈王)의 치적, 문무왕(文武王)의 업적 및 백제 평정에 관한 것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글씨가 명필이다.

 

 

임신서기석

 

임신서기석 - 壬申誓記石​

비문(碑文)의 첫머리에 壬申年이라는 간지(干支)가 있고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있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 한다.

비문은 구획선 없이 5행(行) 74자를 새겼다.

내용은 화랑도의 기본정신에 따른 충도(忠道)의 실천을 서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제작연대인 壬申年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화랑도가 번창하던 552년, 또는 612년으로 추정된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32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정도의 크기다.

 

 

다음 전시실로 넘어간다.

 

 

골프치는 장군?

얼굴이나 머리장식이 이국적이다.

 

 

 

 

당나라 유물?

 

 

잠시 쉰다.

다리 아프다.

이제 시작인데

유물 하나하나 세밀히 들여다 보면서 왔더니

보통 힘든 게 아니다.

박물관 쉽게 볼 게 아니다.

 

다음 전시실로 들어선다.

 

 

팸플릿 추천 보물 네번째

얼굴무늬 수막새가 반긴다.

 

 

신라의 미소

보는 방향에 따라 미소가 달라진다.

옆에서 보니 환하게 웃는다.

 

 

얼굴무늬 수막새 - 人面文圓瓦當​

얼굴무늬 수막새는

도톰한 입술과 위로 들린 입꼬리, 얕은 볼, 살짝 내민 눈동자가

서로 어우러져 천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막새에 얼굴형상을 하여 지붕 위에 올렸던 이유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는 의도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영묘사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일본인 다나카 토시노부가 구하여 보관하다

1972년 10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이다.

기와의 제작연대는

외측에 넓은 테두리를 마련하고 높은 온도에서 구운 점, 얼굴 양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11.5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국은 기념실로 들어선다.

기중한 거란다.

이 귀한 유물을 기증하려고 마음 먹은 게 대단하다.

평생 수집하느라 엄청 많은 비용이 들었을 텐데

 

 

돌문이다.

 

 

얼굴없는 토기

 

 

모양이 웃겨서

 

소조십이지상 - 塑造十二支像​

흙으로 빚어 구운 소조상으로

쥐, 소, 호랑이, 토끼,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9점이다.

나머지 3점은 발견될 때 파손되었다.

무장의 복장이 아닌 평복을 입고 손을 맞잡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오리모양 토기가 또 나온다.

 

 

오리모양 토기 - 鴨形土器​

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오리모양토기이다.

속이 비어 있고 등에는 붓는 구멍이 있으며 꼬리 부분에 따르는 구멍이 있다.

배 아래 쪽에는 굽다리가 달려 있다.

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껴묻거리 용으로 따로 제작된 듯 하다.

이러한 토기의 제작은 낙동강 유역의 새 숭배사상과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팸플릿 추천 보물 다섯번째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이다.

 

기마인물형토기 - 騎馬人物形土器​

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말탄 무사 모양의 토기이다.

말의 등에는 두 개의 뿔모양 잔이 좌우대칭으로 놓여져 있다.

말의 몸체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판으로 엮어진 갑옷이 입혀져 있다.

말 등에는 무사가 앉아 있는데 역시 투구와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이다.

오른 손에는 창을, 왼 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세부적인 부분까지 표현되어 있어 당시 무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23.2cm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말탄 장수가 멋지다.

말 얼굴이 살아있다.

눈으로 말하고 있다.

 

조금 깨진게 아쉽다.

 

 

 

 

청동 옻칠 발걸이

말 탈때 발을 걸오 놓는 곳

 

옻칠발걸이 - 黑漆壺形鐙子​

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청동으로 만들고 흑칠한 발걸이이다.

말을 탈 때 사용되던 것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덧버선과 같다.

덮개에는 선을 촘촘하게 배치해 장식하고

위쪽과 아래쪽에는 구름과 같은 형태의 무늬로 장식하였다.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본 정창원 소장 발걸이와 비교하여 볼 때 통일신라로 추정된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15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시도 있다.

 

 

허리띠 장식

 

 

 

 

방울방울

말방울이란다.

 

 

이것도 방울이다.

양쪽에 달려 특이한 모양

 

 

쇠북?

 

건통9년 명반자 - 「乾統九年」銘飯子​

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청동으로 만든 북이다.

사찰에서 사용하던 타악기로,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부른다.

사찰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가운데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와 동심원무늬가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

북의 명문에는 고려 1109년 중림사의 주지 현의대사 충조가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청동 여래입상

 

 

작은 반가사유상도 있다.

 

금동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본래 싯달타 태자가

출가 전 또는 출가 직후 인생에 대하여 고민에 빠져있던 자세에서 비롯되었으며,

나중에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미래불인 미륵불이 성불成佛하기 전 단계인 미륵보살로도 이해되었다.

이 상은 머리에 단순화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상체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모습이다.

이와 비슷한 반가사유상으로는 국보 제83호 대형 금동상을 비롯하여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의 목조상 등이 있다.

출토지가 경주로 신라에서 유행했던 반가사유상의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개글에서 -

 

크기가 14.3c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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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라역사관 보았다.

다음은 신라미술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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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2. 25.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천년을 보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