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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포항 1년 살기?

경주 낭산 일원 - 신문왕릉,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낭산 소나무 숲, 능지탑지, 마애보살 삼존좌상, 황복사지 삼층석탑

by 솔이끼 2024. 3. 14.

 

2024. 3. 3.

경주 낭산 주변 신라유적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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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은 낮은 산이다.

해발 99.5m 정도

그래도 들판에 솟은 당당한 산이다.

그곳에는 신라 유적들이 있다.

 

경주 낭산 일원 - 慶州 狼山 一圓 - 사적

누에고치모양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낮은 구릉을 이루는 이 산은

신라 실성왕 12년(413)부터 신성하게 여겨져 성역으로 보존되어 온 곳이다.
기록에는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 복을 주는 지역이다.

이제부터는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7세기부터는 불교의 성스러운 산으로 왕실에 복을 주는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하여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신라 유적이 많이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낭산 주변 신라유적 찾기는

신문왕릉에서 시작한다.

신문왕릉은 한적해서 주차하기 좋다.

 

 

신문왕릉은 담장으로 둘러있다.

그래도 격식을 갖춘 왕릉이다.

 

경주 신문왕릉 - 慶州 神文王陵 - 사적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어,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문으로 들어서니 멋진 왕릉 보여준다.

 

 

소나무가 호위하듯 왕릉을 지키고 있다.

 

 

경주 시내 인근 왕릉하고는 완전 다른 모습이다.

봉분 아래는 돌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둘레돌을 쌓고

비스듬한 받침돌을 세웠다.

 

 

견고하고 정성스럽게 만든 왕릉이다.

 

 

받침돌이 단순하면서도 멋지다.

근데 받침돌이 몇 개일까?

궁금해서 세어 보았다.

 

 

받침돌에 ' '이라고 새겨 놓은 게 있다.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를 표시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신문왕릉 나온다.

받침돌 갯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숫자다.

보통 12의 배수로 생각 할 수 있는 데

그래서 24, 36, 48 등

 

그런데 세어보니  44개다.

44는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한참 고민하다 떠오르는 게 없어 그냥 나왔다.

 

 

도로 따라 조금 오니

사천왕사지 보인다.

 

 

머리잘린 귀부가 한쌍 있다.

 

 

두개의 귀부

머리가 똑같이 잘려 나갔다.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이정표 있다.

 

 

당간지주가 옛 절터임을 알려준다.

 

 

경주 사천왕사지 - 慶州 四天王寺址 - 사적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도로 옆 얕은 언덕 느낌이다.

 

 

탑 기단부를 복원해 놓았다.

 

 

복원할 거라면 다 했으면 더 좋았을 건데

왜 기단부만?

 

 

목탑이 세워졌던 기단석

 

 

여기도

기단석이 멋지다.

아주 정성을 들였다.

 

 

회랑 주초들이 남아있다.

전체 모습이 복원된다면 아주 멋진 절이 될 것 같다.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소나무 숲길 멋지다.

 

 

선덕여왕릉은 낭산 정상부에 있다.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은 선덕여왕릉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경주 선덕여왕릉 - 慶州 善德女王陵 - 사적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소나무 숲 한 가운데 있다.

 

 

불규칙한 둘레돌을 잘 쌓았다.

호석 비슷한 모양의 돌들도 세웠다.

 

 

비스듬한 곳에 땅을 고르지 않고 왕릉을 만들었다.

 

 

선덕여왕릉 옆으로 길이 이어진다.

 

 

능지탑지로 가는 길이다.

 

 

소나무 숲 정말 멋지다.

가장 멋진 소나무 숲길 중 하나로 꼽겠다.

 

 

 

 

낭산 소나무 숲을 가로지르는 길을 걸어간다.

 

 

능지탑지 나온다.

 

 

탑 모양이 특이하고, 이름도 특이하다.

그냥 능지탑이라 하면 되는 데

굳이 능지탑지라로 했다.

 

 

탑 이름의 비밀을 찾았다.

 

경주 능지탑지 - 慶州陵只塔址 - 시도기념물

경북 경주시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도 추정되고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능지탑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에 

원래의 탑이 아니라 여러 재료들을 맞추어 놓은 것이란다.

 

 

연꽃무늬 석재 아래 12지신상을 벽면마다 3개씩 만들었다.

 

 

벽면 석재는 연꽃무늬, 12지신상 석재와 다른 느낌이다.

 

 

중생사로 간다.

마애불 보러 간다.

 

 

중생사

새로 지은 절이다.

마당이 시원스럽게 넓다.

왼편으로 마애불 보인다.

 

 

마애보살이라더니 정말인가보다.

전각 이름이 지장전이라고 붙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 慶州 狼山 磨崖菩薩三尊坐像 - 보물

경주 낭산 서쪽 기슭의 바위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한 상태이다.

가운데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본존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불이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양감있는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살짝 미소를 띤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지장 보살의 모습과 비슷하여 흥미롭다.

양 협시는 본존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몸에 갑옷을 입고 있다.

왼쪽 협시는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협시는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陵只塔)이 이곳과 가까이 있는 점과

조각수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부처가 아니었다.

지장보살과 양쪽에 신장상이다.

 

 

석공이 바위 선택을 잘 못 한 것 같다.

정성을 들여 조각했을 텐데, 바위가 풍화가 아주 심하게 됐다.

 

 

능지탑지로 돌아나와

낭산을 가로질러 넘어간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찾아간다.

 

 

경주 보문들이다.

신라 천년 경주를 유지시킨 넓은 들이다.

 

 

마을 옆 삼층석탑 있다.

크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 국보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국보로 지정된 탑이다.

 

 

탑이 아주 깔끔하다.

 

 

 

지붕돌 선이 살짝 올라간 게 정말 예술이다.

 

 

삼층석탑의 예술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황복사는 사라지고 탑만 남았다.

넓은 보문들을 바라보고 서서 천년을 지키고 있다.

 

 

신문왕릉에서 낭산 올라 선덕여왕릉 보고

능지탑지와 마애보살 삼존좌상 그리고 황복사지 삼층석탑 보았다.

해도 서산에 가까워진다.

보문들로 걸어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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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3. 경주 낭산 주변 둘러보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