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6. 가을 여행 중
함양 개평마을 일두고택 보다.
*
*
남계서원을 들렀다.
정여창을 배향한 서원
함양에 정여창 생가인 일두고택이 있다.
남계서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들러다 간다.
개평마을
일두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바닥에 박석을 깔았는 데
걷기 불편하다.
안하니만 못한 정비
솟을대문 있다.
일두고택
정여창 호가 일두다.
함양 일두고택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3,000여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 대문에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게 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가 앞 쪽으로 달린 전출 구조이며,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고 가늘고 긴 석주(石柱)를 초석으로 삼았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白世淸風)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세워져 있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향한 一字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하다.
안채 좌측으로는 아래채가 있고,
뒤편으로는 가묘(家廟),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옛 손길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여창 고택은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며,
정여창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함양 일두고택'이라 한다.
특히 본 가옥은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문화유적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함양군 소개글에서 -
문으로 들어서니 멋진 고택 나온다.
소나무가 있는 큰 마당
축대위에 자리잡은 사랑채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을 이곳에서 촬영했단다.
'문헌세가' 현판이 붙어있다.
정여창(鄭汝昌)은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정여창 선생에 대해 알아봄
벽에는 큰 글씨로 '충효절의'를 써 놓았다.
사랑채 마루가 멋지다.
아래는 창고를 만들어 놓았다.
마루 앞 소나무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협문을 지나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나온다.
안채
가운데 우물이 있다.
우물 옆
맨드라미가 붉게 피었다.
섬돌이 엄청 크다.
어떻게 가져 왔을까?
안채 양 옆으로 문이 있다.
안채 뒤뜰
안채를 나오면 건물 하나
사랑채와 터진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담장 오른편은 사랑채
전면은 안채로 가는 문이다.
한바퀴 돌 수 있는 건물 배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이 있고
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나오고
안채를 따라 나오면 사당으로 가는 문
사랑채 방향으로 나오는 문이 있다.
담장따라 나오면
터진 문이 있고 사랑채 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
멋진 공간 배치다.
화려하면서도 이동 동선을 줄일 수 있는
건물과 배치
멋진 고택이다.
*
*
*
2024. 9. 6. 일두 정여창 고택을 가다.
길 위에 서 있을 때
'문화유산 둘러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주여행 - 가야산 아래 삼층석탑만 덩그러이 서 있는 성주 법수사지 (8) | 2024.09.13 |
---|---|
함양여행 - 정여창 현감이 중건한 안의 광풍루 (1) | 2024.09.13 |
함양여행 -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과 소나무가 멋진 청계서원 (1) | 2024.09.12 |
함양여행 -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와 학사루 (2) | 2024.09.12 |
중국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은 협곡 사이 숨은 암자, 주왕산 주왕암 (1) | 202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