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둘러보기

성주여행 - 가야산 아래 삼층석탑만 덩그러이 서 있는 성주 법수사지

by 솔이끼 2024. 9. 13.


2024. 9. 7. 가을 여행 2일째

비내리는 날 성주 법수사지 가다.

 

*

 

*

 

가을 여행 2일째

가야산 만물상 코스 등산을 예약했다.

그러나

비가 내린다.

안개도 잔뜩 끼어 산행하기에 부적절?

아니 위험할 수도 있다.

 

예약 한 걸 노쇼 할 수도 없고

탐방로 까지 갔는 데

예약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등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일로 예약하고 내려왔다.

 

어디로 가 볼까?

가장 가까운 곳에 삼층석탑이 있더라.

보러 가자.

 

 

성주 법수사지 왔다.

주차공간은 없다.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탑은 멋지던데

주변은 꽝

 

 

더욱 황당한 건

건물터 주초를 조형석으로 다 바꾸어 놓았다.

복원도 아니고 관광지도 될 수 없는 형태

폐사지의 정취는 사라져 버렸다.

 

 

유적을 발굴한 흔적

기와편으로 탑을 만들어 놓았다.

 

 

 

법수사지 삼층석탑

비 속에서도 정갈한 모습을 보여준다.

 

 

엄청 큰 연화대좌 기단석

이정도 크기면 위에 올린 석불이나 석등이 엄청 컸을 텐데

원래 있던 자리도 아닌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

 

 

삼층석탑은 예쁘다.

많이 깨지지 않고 원형을 잘 보여준다.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지는 주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위치에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전망이 아주 좋다.

 

대가람으로 전해지는 법수사(法水寺)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廢寺)되고

석탑과 금당(金堂)터의 거대한 석축,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계자인 김황(金湟)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사찰이 언제 어떻게 폐사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다고 『경산지(京山志)』 불우조(佛宇條)에 전한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2중의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법수사지의 제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 성주군 소개글에서 -

 

 

탑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폐사지에 삼층석탑 하나만 외로이 서있는 모습

비까지 내리는 데

 

 

 

 

절터 잔해들을 모아 놓은 게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부서진 것도 서러운 데

있는 자리마저도 빼앗겨 버린 

어떤 용도였는 지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잔해물이 되어 버렸다.

 

 

비오는 날

허탈한 폐사지를 보았다.

마음이 폐사되는 것 같다.

 

*

 

*

 

*

 

2024. 9. 7. 성주 법수사지의 아픔을 보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