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둘러보기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

by 솔이끼 2015. 10. 28.

 

 

2015.10.18

가야산 해인사

 

 

 

 

해인사 들어가는 길

 

홍류동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아름답다는데, 아직 단풍이 이르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 계곡을 따라 오른다. 해인사 입구 승탑들을 만난다. 한국 현대 불교의 큰 스님이신 성철스님의 승탑도 보인다.

 

승탑 옆 해인사 길상탑(吉祥塔)이 자리를 잡았다. 석탑으로는 크기가 작은데도 보물 제1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통 탑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탑에서 나온 유물들이 가치가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작은 탑이 157개가 나오고,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 나왔다. 이 탑지는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길상탑

 

 

 

 

영지

 

 

 

 

화엄십찰의 하나인 해인사

 

가야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창건하였으며,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해인사라는 이름은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유래된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은 신라의 의상이 화엄종을 종지로 삼아 세우거나 전교했다는 열 개의 절

최치원이 찬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화엄십찰이 기록되어 있다.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북악 태백산의 부석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와 보광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양주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한주 부아산의 청담사다.

 

 

 

 

 

 

 

 

 

 

 

 

 

마당에 미로가 있는 절집

 

일주문 앞에는 오른쪽에는 당간지주가 섰고, 왼쪽에는 원표라고 새긴 커다란 석주가 섰다. 일주문을 지나면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든 길이 펼쳐진다. 가을이 물씬 풍기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해인총림(海印叢林)이라는 커다란 현판을 단 봉황문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면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이라는 현판이 걸린 해탈문으로 들어선다.

 

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건너편에는 구광루(九光樓)라는 누각이 있고, 마당에는 미로가 그려져 있다. 해인도(海印圖)란다. 해인도는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요약한 210자 7언 30구의 게송을 만(卍)자를 발전시킨 도안에 새긴 것이다. 210자의 게송을 미로와 같이 54번 꺾어 도는 동안 그 내용을 마음에 체득하면서 따라가면 깨달음에 도달한단다.

 

구광루는 누각 건물인데, 아래를 막아 놓았다. 보통 누각아래를 통해 들어가는데. 양 옆으로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다시 마당이 나온다. 마당에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석등과 3층석탑이 섰다. 그 뒤로 높은 단 위에 대적광전이 자리를 잡았다. 대적광전은 4면에 현판을 달아 놓았다. 법보단(法寶壇), 금강계단(金剛戒壇), 대방광전(大方廣殿). 특이한 모습이다.

 

 

 

 

 

 

 

 

 

 

 

 

 

 

 

 

 

 

 

 

 

 

 

 

 

 

 

 

대적광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장경판전

 

대적광전 뒤로 높은 계단과 더불어 담장이 쳐져 있다. 작은 문은 팔만대장경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나온다. 둥그런 문을 달고 있는 수다라장(修多羅藏)이 나온다. 국보 제52호로 지정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이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대장경판

 

장경판전 안에는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해인사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있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을 포함하여 81,258장이 보관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경판전은 건물이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에 작은 마당이 있어 네모형태다.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다. 최근 사찰에 방화가 많이 발생하여 접근을 막고 있단다. 여러 명의 감시원들이 지키고 있다. 안타깝다. 수다라장 네모진 창살이 늙어버린 것 같다.

 

장경판전 왼쪽에는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최치원이 심은 전나무라고 한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당당하게 서 있다.

 

 

 

 

 

 

 

학사대

 

 

 

 

 

 

 

 

 

 

.

 

.

 

.

 

2015.10.18. 합천 해인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