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둘러보기

[경주여행] 3층만 남아있어 아쉬운 분황사 모전석탑

by 솔이끼 2015. 10. 7.

 

 

2015.9.11.

경주여행

 

분황사로 향한다.

분황사는 몇 번 가 봤다.

 

다시 찾은 이유는 웅장한 모전석탑을 보고 싶다.

또 보고 싶다.

인왕상과 마주하고 싶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세운 신라 명찰 중 하나로

여왕의 향기가 물씬 나는 이름으로, 향기 '분'자에 황제 '황'자를 써 분황사로 칭했다.

 

호국사찰인 황룡사와 함께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국찰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몽골군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되었고,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과, 조선시대에 세워진 보광전만이 남게 되었다.

 

자장과 원효가 거쳐 간 절로도 유명하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며,

경덕왕 때는 ‘희명’이라는 다섯 살 여자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천수대비의 그림도 유명하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정말 웅장한 탑이다.

당시 이정도 탑을 쌓으려면 엄청난 공력이 들어야 했을 것이다.

 

돌들을 별돌 같이 다듬고

무너지지 않도록 정확한 계산을 해서 쌓아 올리고

면마다 문을 만들고 인왕상을 새긴 공력은 지금이라도 하기 힘들겠다.

 

그러나 역시 아쉽다.

황룡사 탑이 9층이었다면

분황사 탑도 9층이었을 것인데...

삼층만 남아있는 게 아쉽다.

 

 

 

 

 

 

 

 

 

 

 

 

 

 

 

 

인왕상 모습이 정말 멋지다.

화강암으로 이렇게 멋진 조각을 할 수 있는 신라인들의 솜씨에 감탄한다.

 

 

 

 

 

 

 

 

 

 

 

 

 

분황사 석정(문화재자료 제9호)은 

분황사 사찰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감탄

하나의 돌을 다듬어 이런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단함

 

 

 

 

분황사에 남아있는 절집이다.

보광전

예전에 보지 못했던 벽화가 보인다.

아니 관심있게 보지 않았던...

 

 

 

 

분황사 약사여래입상(문화재자료 제319호)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 보수시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보광전 벽에 그려진 벽화다.

아주 섬세하고 멋지다.

 

 

 

 

 

 

 

 

 

 

 

 

 

.

 

.

 

.

 

2015.9.11. 경주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