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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경주여행] 삼층석탑이 있는 감은사지와 수중릉인 문무대왕릉

by 솔이끼 2015. 10. 4.

 

 

2015.9.19.

경주 여행

 

감은사지로 간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보러 간다.

경주시내를 벗어나 산을 넘어간다.

구불구불 한참을 가다 넓은 들이 나온다.

반듯한 도로를 따라간 곳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석탑 두기가 섰다.

 

야릇한 풍경이다.

 

 

 

 

 

 

 

감은사지에 선 느낌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의 용이 드나들었다는데...

근육질의 산만 울퉁불퉁 보인다.

 

크다.

삼층석탑이 크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경주 감은사지(사적 제31호)는 폐사지다.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감은사는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왕이 드나드는 사찰이어서 회랑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금당 앞의 탑 2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이다.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모른다.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舊 감은사지삼층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 느낌은 "정말 크다."

 

감은사지 삼층걱탑은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감은사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니다.

뒤를 감싸고 있는 산과 석탑이 잘 어울린다.

 

 

 

 

저 뒤로 동해바다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탑만 남아 있는 절집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웅장한 탑이어서 더 그런다.

옛날의 화려함을 표현하고 있어 더 그렇다.

 

 

 

 

 

 

 

 

 

 

 

 

 

 

 

 

 

 

 

 

 

 

 

 

 

 

 

 

회랑터를 한바퀴 돌아서 금당터로 올라간다.

금당터는 특이하다.

기단을 만들고 기단 안에 지상과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동해바다 쪽으로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동해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즉 금당은 용이 된 문무대왕이 쉬는 곳이다.

 

 

 

 

 

 

 

 

 

 

 

 

 

풀 숲에 작은 통로가 용이 드나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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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를 나와 문무대왕릉으로 향한다.

 

 

 

 

경주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은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동해바다는 언제 봐도 장엄하다.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바다다.

거칠다.

 

 

 

 

 

 

 

 

 

 

아! 문무대왕릉

 

처음 본 느낌은

생각보다 작다.

넓은 바다에 작은 바위

문무대왕의 크기에 비해 작은 바위가 연결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의문

당시 삼국을 통일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신라가

바다건너 왜의 침략이 두려워

바다의 용이 되어 왜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발상에 의문이 간다.

 

신라라는 나라는 불가사의 나라다.

 

 

 

 

 

 

 

 

 

 

 

 

 

여름이 지나간

쓸쓸한 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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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10. 경주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