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둘러보기

[경주여행] 웅장했을 사천왕사지와 정갈한 선덕여왕릉

by 솔이끼 2015. 10. 6.

 

 

2015.9.11.

경주 여행

 

선덕여왕릉을 찾아간다.

선덕여왕릉 입구에 사천왕사지가 있다.

뜻하지 않은 횡재다.

 

 

 

 

아!

사천왕사는 황량하다.

넓은 절터에 땅위로 솟은 석물 하나 보이지 않는다.

길 옆에 생뚱맞게 서 있는 당간지주를 빼고는

 

 

 

 

 

 

 

경주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는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풀밭에 귀부 2기가 남아있다.

목도 없어지고 비신도 없다.

사천왕사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절터는 5개의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주춧돌(?)이 놓여 있다.

당나라 군을 물리칠 때  사천왕사를 세우고

문두루비법을 썼다는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세웠던 곳이다.

 

문두루비법은 ‘관정경’(灌頂經·밀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에 나오는 문두루법(Mundra·神印法)에 따른 주술(呪術)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가지고 향하는 곳이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이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오방신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천년의 세월이 아쉽다.

사천왕사가 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말 멋있었을 것 같다.

웅장한 오방신이 서있는 절.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외국의 문화유산을 보고나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초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초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원해서 모형이라도 만들어 놓았으면 좋겠다.

 

.

 

.

 

.

 

 

 

선덕여왕릉으로 향한다.

선덕여왕릉은 산에 있다.

낭산

 

 

 

 

경주 낭산은 누에고치모양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낮은 구릉을 이루는 산이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부터 신성하게 여겨져 성역으로 보존되어 온 곳이다.

기록에는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 복을 주는 지역이다.

이제부터는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7세기부터는 불교의 성스러운 산으로 왕실에 복을 주는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하여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터,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신라 유적이 많이 있다.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

소나무 숲길이 좋다.

 

 

 

 

 

 

 

 

 

 

경주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소나무 숲 한 가운데 자리잡았다.

정갈한 느낌

여인으로서 왕이 되어 한 나라를 다스렸던 여장부

그 왕릉은 수많은 소나무들이 지키는 낭산에 자리를 잡았다.

 

 

 

 

 

 

 

 

 

 

 

 

 

내려오는 길

소나무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멋지다.

 

 

 

 

 

 

 

 

 

 

선덕여왕릉에서의 감정은

여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정갈함

 

.

 

.

 

.

 

2015.9.11. 경주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