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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추사와 원교의 글씨를 볼 수 있는 해남 대흥사

by 솔이끼 2014. 4. 26.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사적(508호)및 명승(66호)로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 왕벚나무의 자생지로 유명하며, 1120여종의 난대식물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두륜산은 중국 곤륜(崑崙)산맥의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서 백두산을 이루고 그 줄기가 남으로 흐르다가 한반도의 땅끝에서 홀연히 일어나 쌍봉을 이루고 일어선 산 이라고 두륜산(703m)이라한다.


천년고찰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5년 (544, 백제성왕 22)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서산대사 유언과 의발이 전해진 삼재불입지처로 불교문화의 중흥을 이룬 곳이다.

또 나라의 국제를 지낸 표충사와 한국 차의 산실 일지암 등에서는 초의선사와 추사김정희 등 당대 명사들의 글과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대흥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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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두륜산이 병풍처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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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계루

 

 

 

 

 

 

 

 

 

 

원교 이광사 글씨

 

 

 

 

대흥사 대웅전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주도 귀양길에 추사는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다.

 

귀양살이가는 처지이면서도 추사는 그 기개가 살아 있어 대흥사의 현판글씨들을 비판하며 초의에게 하는 말이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의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7년 3개월을 제주에서 보내고

추사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초의를 만나 회포를 풀던 자리에서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있다.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교 이광사 글씨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글씨

 

 

 

 

 

 

 

 

 

 

 

 

 

추사 김정희 글씨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320호로 지정된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海南 大興寺 三層石塔)응진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나무 두개가 붙은 연리지

한곳이 아닌 두 곳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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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5. 해남 대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