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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여수 문화유적. 진남관, 여수향교, 연등동 벅수...

by 솔이끼 2014. 5. 5.

 

 

2014.3.22.

여수시내 문화유적을 찾아 걸어본다.

 

 

 

 

여수 대표적인 문화유적인 진남관

그리고 여수향교, 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 연등동 벅수, 절도사안숙사적비까지...

그리고 덤으로 여수 골목길.

 

 

 

 

진남관으로 들어선다.

바다를 바라본다는 망해루.

진남관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지어졌다.

남쪽은 왜구...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 문화재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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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 뒤로 나오면 여수의 골목을 볼 수 있다.

여수의 엿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정감있는 길이다.

 

 

 

 

진남관 뒤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여수향교가 나온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된 여수 향교

전라좌수영이 폐영(고종 32년, 1895년)되고

2년 후인 1897년 여수군이 부설되면서 종고산하 군자동 현 위치에 세워졌다.

 

 

광무 1년(1897)에 여수군이 복설되면서 군 유림의 합의에 따라 향교설치를 결의하여

유림안부터 편성함으로써 그들 유림들이 종고산 남쪽에 대성전과 동·서 양재를 창건하였다.

 

이어 명륜당과 수호사를 충족하는 한편 향전 170두락을 매입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치하에 들어와 향사 전답이 학교비용으로 몰입전용 됨으로써 향사가 어렵게 되자

향중유림이 존성계를 설치하여 제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 유림들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재와 풍화루까지 신축하였으며,

1945년 대성전 중건 확장, 1982년 명륜당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수향교는 지방교육을 담당하였고

지역 유림들만의 모금과 출의(出義)에 의하여 교관(校官)이 건립되고 당우가 중수되었다.

대성전에는 정위에 공자, 배향에 인자, 증자, 자사, 맹자의 오성을 봉안하였고

동서부에는 18선현을 동서로 나누어 매년 춘, 추, 석전제를 모시고 있다.

 

-여수시청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향교내에 있는 집

 

 

 

 

 

 

 

여수향교를 나와 골목길을 걸어간다.

여수의 매력인 골목길을 걸을 수 있다.

 

 

 

 

 

 

 

바다가 보인다.

 

 

 

 

건너편으로

여수의 숨은 풍경을 보여준다.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고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2호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湖左水營守城創設事蹟碑)가 골목 속에 숨어있다.

 

비신에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湖左水營守城創設事蹟碑)라는 이름(碑題)을 새겨놓았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당시 의승 수군 300여 명이 전라좌수영을 보수하고, 자원해서 지켰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이나 의승 수군의 활동, 특히 토병(土兵)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비신의 뒷면에「乾隆四十四年己亥十月日土兵立義僧自願助役」라는 음기가 있어 정조 3년(1799)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좌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는 이 비석의 비좌와 비신은 장방향이다.

비좌의 4면에 모두 안상을 새겼고 비신의 아랫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 여수시청에서 -

 

 

 

 

 

중요민속문화재 제224호로 지정된 연등동 벅수다. 

 

 

벅수는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몸통에 이름을 새긴 것으로,

마을 수호신이나 이정표, 가람(절)수호신,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 기능 등 그 역할에 다양한데,

여수 지역 벅수에는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라는 명문을 새기고 있어 지역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쓴『사기(史記)』역서조(歷書條)에 '남정'과 ‘화정은 아주 옛날 중국의 관직명이고

 '중'과 '려'는 사람 이름으로 남정과 화정이라는 관직을 '중' 과 ‘려라는 사람이 맡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화정' 은불, 여름과 남쪽 바다를 지키는 신으로도 표현되는데,

이는 우리 나라 무속 신앙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변화로 보인다.

 여기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 지역 특성상 해안 방위의 개념이 더해진 것으로 보여지며,

연등동 벅수의 위치가 옛 전라좌수영 서문으로부터 약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성문 수호와 읍락 비보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연등동 벅수 중 동쪽에 있는 '남정중'은

전체 길이 174㎝, 머리 길이 85㎝, 둘레145㎝로

복두형 관모에 치켜진 눈썹, 달걀 모양의 눈, 길고 큰 자루병코와

드문드문 이빨이 보이는 벌린 입 그리고 양 갈래의 작고 뽀족한 턱수염을 그린 형태이다.

 

서쪽에는 있는 '화정려'는 전체 길이 166㎝, 머리 길이 86㎝, 둘레 130㎝로

사방관형의 관모에 올라간 눈썹, 길고 두툼한 귀, 길고 코볼이 넓은 매부리코,

왕방울 눈, 성긴 이빨이 보이는 벌린 입을 하고 있다.

또한 각 벅수의 머리와 눈썹, 꽃수염, 턱수염 등에 검은 칠을 한 흔적이 어렵풋이 보인다.

 

연등동 벅수는 다른 벅수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작 연대가

 '화정려' 뒷면에「戊申四月二十八日 午時立化主 · 主事 金 · 昇」라고 새겨져 있어

 정조 12년(178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벅수는 해안 지방에서만 나타나는 조각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얼굴의 비례에 비해 코가 크게 표현된 것으로

 현대 돌장승 제작자들이 정 쪼기 흐름을 공부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여수시청에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3호로 지정된 절도사 안숙사적비(節度使安事蹟碑)는

순조 23년(1823) 세워진 것으로,

순조 9년(1809) 호남좌수사로 부임한 안숙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여수에서 안숙은 문무를 권장하고 좌수영성을 수리하였으며 주민 구제에 노력하였다.

부하 군졸을 친가족처럼 여기고 서민의 혼례,장례 등 길흉사를 도왔으며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아 주는 등 선정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좌수영 본영의 거북선이 낡아 훼손되자

임진왜란 때 도본(圖本)을 참고하여 이를 복원하였으며,

해골선도 보수하였다.

 

좌수사 안숙이 이듬해 여수를 떠나자

그를 믿고 따르던 백성들이 이 사적비를 세워 그의 치적(治積)을 기렸다.

-여수시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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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22. 여수 문화유적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