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5.
순천향교와 옥천서원
순천 문화의거리를 지나 위로 올라가면 순천향교(順天鄕校)가 나온다.
향교는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조선시대말(조선시대末)까지 있었던 지방교육기관(地方敎育機關)으로 문묘공간(文廟空間)인 대성전(大成殿)과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 등의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순천향교는 태종 7년(1407)에 성동리에 세웠으나 1550년에 옮겼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순조 1년(1801)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배움의 공간이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외삼문(外三門)·과 명륜당은 앞쪽에 내삼문(內三門)과 대성전은 뒤쪽에 일직선으로 놓여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식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선 좌우에는 동(東)·서재(西齋)가 있는데, 동재는 양반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서재는 서류를 두었던 곳이다.
순천향교 정문인 외삼문은 잠겨있다. 대신 안내문을 걸었다. 돌담길 따라서 50m 정도 걸어가라고 한다. 옛날에 쌓았던 돌담과 근래에 지은 집들과 어울려 있다. 분기기 좋은 골목이다. 돌담이 끝나는 곳에 솟을 대문이 있다. 문은 열려 있다. 문밖에서 향고 안이 그대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선다.
순천향교 내에는 근래에 세운 공적비 1기를 제외한 총 14기의 비석이 있다. 이들 14기의 현황을 보면 선정비 3기, 불망비 3기, 흥학비 2기, 기타 2기, 나머지는 비명판독이 전혀 불가능한 것들이다. 또한 이들 중 건립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3기에 불과하다.
한쪽 벽면에 향교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걸개그림이 걸렸다. 쉽게 말하면 향교에는 오성(공자, 증자, 안자, 맹자, 자사자)과 송조사현(주돈이, 정호, 정이,주희),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을 모시는 곳이다. 18현은 동쪽에 8현(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서쪽에 8현(최치원, 정몽지,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다. 신라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유학자를 모신다.
향교 마당이다. 내삼문 너머로 대성전이 보인다.
계단 소맷돌에 거묵이가 기어 다닌다. 정성을 들인 석물이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잠겨있다.
향교에서는 순천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향교를 나와 골목길을 이리저리 빠져나오면 순천시내를 흐르는 옥천과 만난다. 천변에는 옥천서원이 있다. 향교가 국립교육기관인데 비해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이다. 옥천서원 입구에는 500년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여기도 애국열풍이다. 태극기를 바람개비로 만들어 꽂아 놓았다. 애국심은 마음에서 우러러 나와야 하는데, 후진국일수록 인위적으로 조장하려고 한다. 국민들을 쉽게 통제하고 국민정신을 단순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무기다.
옥천서원(玉川書院)은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때 김종직 일파로 연루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移配)되어 죽자, 그 학덕을 기려 명종 19년(1564) 부사 이정(李楨)이 처음 창건하여 경현당이라 하였다. 명종 20년(1565) 김굉필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지으면서 옥천정사(玉川精舍)라 하다가 선조 1년(1568) 순천부사 김계의 상소에 의하여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뒤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8년 유림들이 복설(復說)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굉필은 조선 초기의 학자로 어려서부터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웠고 형조좌랑을 지냈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희천·순천에 유배 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죽었다. 조선조 오현(五賢)의 한사람으로 불리며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광해군때 전국유생의 상소에 의해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옥천서원 바로 옆에 비석이 서 있다. 비석은 크게 세웠는데, 폭은 넓고 높이는 낮아 조금 어색한 모양이다. 임청대(臨淸臺)라는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임청대 김굉필과 조위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조선 연산군(재위 1494∼1506) 때 무오사화(1498)로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 '임청(臨淸)'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대 이름은 조위 선생이 지은 것이라 한다.
갑자사화(1504)로 김굉필과 조위가 죽었다. 명종(明宗) 18년(1563) 구암(龜岩) 이정(李禎) 선생이 이곳 태수(太守)로 부임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으로부터 임청대(臨淸臺)란 친필을 받아 비석(碑石)을 세우고, 비석 뒷면에는 연산군 8년(1502)에 조위 선생이 지은 글을 새겼다. 퇴계 이황의 글씨를 볼 수 있다니 영광이다.
옥천서원 옆으로는 옥천이 흐른다. 천변으로 오래된 집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옥천의 흐르는 물과 어우러진 풍경을 한참 바라본다. 발길을 돌려 순천선교유적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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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5. 순천향교와 옥천서원 임청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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