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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논 한 가운데 금환락지를 만든 곡전재

by 솔이끼 2015. 1. 13.

 

 

2014.11.16.

 

운조루를 둘러보고

농로를 따라 내려가면 논 한 가운데 둥그런 돌담이 보인다.

 

금환락지라는 곡전재다.

 

 

 

 

논 가운데

돌담을 높게 쌓았다.

그 안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금환락지라고 불렀다.

 

금환락지(金環洛地)의 유래

도선(道詵:高麗名僧) 무학(無學:李朝初名僧) 남사고(南師古: 李朝明宗때 豫言家)등 유명한 地師(지사)들의 秘訣(비결)에 의하면 구례읍에서 동쪽으로 十里를 지나면 큰 明堂터가 있는데 오성(다섯 성씨 水火金木土)바지가 다 살수가 있고 萬戶(만호)가 가희 살수 있다 하였다.

 

이 명당터에 살면 부귀는 물론 白子千孫(백자천손:많은자손)에다 文官(문관) 千名(천명), 武官(무관)이 萬名(만명) 文千武萬(문천무만)이라 하고 王妃(왕비)가 3명이 나고 臥廳朝報(와청조보 30代라 하고 그 부근에 上垈(상대:윗 집터) 中垈(중대) 下垈(하대)가 있어 金龜沒尼(금귀몰니) 金環洛地(금환락지) 五鳳歸巢(오봉귀소)등 陽宅(양택:집터) 3곳이 있고 四大陰宅(사대음택:묘자리)이 있는데 月明峰下化爭飛(월명봉하화쟁비) 鷄鳴邱隅東嶺曉(계명구우동령효) 水廻券頭龍喜笑(수회권두용희소) 馬?三脊北岸肥(마비삼척북안비)라 하였다.

 

이 명당은 下元甲(1984년)부터 운이 돌아온다 하였다. 또한 신혼부부들이 이명당터에서 하룻밤만 숙박을 하면 금환락지의 운을 받아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수 있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한다 -http://www.gokjeonjae.com-

 

 

 

 

 

곡전재는

1910년경부터 승주 황전면에 사는 7천석의 부호 박승림이란 분이 明堂을 찾기 위해 십여년을 많은 地官과 함께 수색 끝에 토지면 오미리 環洞(환동)이 금환락지다 확정짓고 李 敎臣(호 穀田:병주의 曾祖父)씨와 함께 건축하게 되었다.

 

그후 박승림씨가 사업상 서울에 거주하고 집은 李敎臣씨가 위임맡고 있었는데 박승림씨가 죽음으로 그의 子婦가 李 敎臣씨에게 인도하여 현재 5代째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이집을 구례문화원에서 金環洛地(금환락지)라 하고 여러대학 건축학자들이 건축이 잘되었다하여 목포대학 건축과에서 일주일 이상 조사한후 문화적 가치가 있다하여 문화재로 할 것을 신청하였다.

 

원래는 6채 53칸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년에 인수당시 동행랑과 중간채를 팔아 훼손되었다가, 현재 소유주 이순백께서 1998년1월 새로이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라 이름 지었으며(5채 51칸 연못(洗淵:세연)을 확장하였다.

 

구례군청에서 몇 년간 향토문화유산을 선정하다 2003년 문화재관리위원의 심의를 거쳐 구례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2003-9호) - http://www.gokjeonjae.com -

 

 

 

 

곡전재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정해진 게 아니고 알아서 낸다.

운조루에 천원을 냈으니 곡전재에도 천원을 낸다.

 

 

 

 

문을 들어서면 정원이 나온다.

 

 

 

 

 

 

 

사랑채가 보인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관람로는 문으로 들어서지 않고 돌아간다.

 

 

 

 

감이 말라간다.

 

 

 

 

관람로는 안채를 빙 돌아서 지나간다.

 

 

 

 

건물 뒤로 대숲이 좋다.

 

 

 

 

대숲에서 집들을 본다.

 

 

 

 

 

 

 

드디어 마당으로 나왔다.

 

 

 

 

안채 풍경이다.

 

 

 

 

할머니가 일만 하신다.

관람객들의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혹시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나도 조심조심

 

 

 

 

조용히 집을 나온다.

 

 

 

 

 

 

 

 

논 한 가운데 둥근 돌담

금환락지의 명당을 스스로 만들어 지은 집

 

명당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살기 좋은 곳이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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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6. 구례 곡전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