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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경주 남산 둘레길 2 - 삼릉에서 통일전까지 - 삼존불, 창림사지, 탑곡마애불상군 찾아가는 길

by 솔이끼 2023. 11. 7.

 

2023. 10. 28.

경주 남산 둘레길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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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에서 칠불암으로 올라 용장마을로 내려왔다.

도로따라 걷다가 경애왕릉, 삼릉까지 둘러봤다.

 

아침 8시경 출발해서

삼릉까지 보고나니 오후 2시반이 넘었다.

배가 무척 고프다.

골병들겠다.

 

 

지나오는 길에 식당이 여럿 있지만

그래도 특이한 식당을 가고 싶었다.

검색한 게 다 맞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래도....

 

 

경주 농가 맛집 수정소반

이름부터가 정감있고

좀 특이할 것 같아서.....

 

 

음식은 깔끔하다.

맛은?

노코멘트.

 

 

다시 삼릉에서 길을 이어간다.

삼존불 찾아간다.

 

등산로와 만난다.

초소에 있는 국립공원공단 직원분에게 길을 묻는다.

이리 저리 가서

삼불사를 찾아가라는 데......

 

 

삼불사는 안나오고

망월사가 나온다.

당황

 

망월사 뒤쪽으로 더 가니 절집 또 나온다.

 

 

삼불사

삼존불은 대체 어디에.....

제발 이정표라도 있으면 좋겠다.

 

 

삼층석탑 뒤편으로 삼존불 살짝 보인다.

 

 

삼존불 알현한다.

정식 이름은 석조여래삼존입상이다.

이름이 너무 어렵다.

 

 

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본존불 미소가 압권이다.

스마일 

 

 

삼존불 기단석은 제각각이다.

높낮이도 안 맞았는 데

일부러 맞춰 놓은 것 같다.

 

 

삼불사 나온다.

 

포석정 찾아간다.

이정표가 있어 좋다.

 

 

 

 

연못 있다.

대진지다.

 

 

연못 뒤로 돌아가서 길을 잃었다.

지마왕릉 측면으로 나왔다.

 

 

祗摩王陵

 

신라 지마왕(112∼134)의 무덤으로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성은 박씨로서 파사왕의 아들이다.

무덤의 모양은 비교적 규모가 큰 둥근무덤으로

남산에 뻗은 경사면의 높은 곳에 만들었으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무덤의 위치와 규모 및 형태로 보아

신라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무덤 앞에 최근에 설치한 작은 석상이 놓여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지마왕릉 옆에 포석정 있다.

포석정은 입장료 받는다.

2천원

큰 기대를 안고 들어선다.

 

 

포석정이다.

경애왕이 술잔 띄워 놓고 즐겼다는 곳

비운의 죽음을 맞이 한 곳

 

 

鮑石亭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5)때로 본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본다.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유상곡수는 서울 창덕궁 후원에도 있기는 하다.

작기는 하지만

 

 

창림사지 삼층석탑 찾아간다.

하나하나 찾아가기도 힘들다.

이정표가 없는 게 더 힘들다.

 

 

언덕에 삼층석탑 서 있는 게 묘한 분위기 풍긴다.

 

 

昌林寺址 三層石塔

 

탑의 조성시기는

사리공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와 ´무구정광대다라니´를

당시 이곳을 찾았던 추사 김정희가 모사하여 두었는데

그 속에 이 무구정탑의 조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 문성왕(844년)때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 이 기록에 대하여서는 다소 이견들이 있다.

석탑은 2중기단을 조성한 후

3개층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이다.

기단부의 구성은 상, 하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는 통돌에 하대면석과 지석으로 구분하여 치석하였고

면석에 각 돌마다 3개의 탱주를 두었다.

탱주의 개수는 석탑 변천의 가장 가시적인 지표로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로 석탑의 조성시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10개의 석재로 구성된 탑의 하층기단부의 구성은

비슷한 시기에 8개의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고식에 가깝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상부기단 면석에는

8부신중상을 양각하고 1구의 탱주를 두어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그 외 면석은 신재로 교체되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창림사 탑 팔부신중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예는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인용사지탑, 진전사탑 등과

인왕상이 조각된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원원사지탑 등과 조각수법을 비교해 볼 때도

기량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1976년 복원을 거치며 2, 3층 탑신과

상층 팔부신중상 중 4매, 기단석재 일부가 신재로 교체되고

상륜부가 없어 탑의 원형이 많은 부분 훼손된 상태이나,

창림사지는 신라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지발굴을 통하여 석탑의 위치도 확인된 바 있고

경주 남산에 보존되고 있는 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또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재를 중심으로

탑의 조성수법을 살펴보면

탑의 규모, 기단부의 구성과 상층기단부면석의 팔부신중상의 조각수법 등에서

신라석탑 조형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 보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기단석에 새겨진 신중상이 사실감 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다.

석탑과 어울려 멋진 풍경 만들어 준다.

 

 

탑이 언덕에 있어 거침이 없다.

지금까지 본 탑 중 멋진 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탑 근처에 앉아 오랜동안 있다 간다.

폐사지에 석탑만 높게 서 있는 풍경이 너무 좋다.

 

 

창림사지 내려오니 길이 좋다.

억새가 늦은 오후 풍경과 잘 어울린다.

 

 

해는 기어이 넘어간다.

 

 

일몰을 본다.

 

 

길을 재촉한다.

 

 

남간사지 당간지주 만난다.

예전 큰 절터였을 건데

덜렁 당간지주만 남았다.

 

 

南澗寺址 幢竿支柱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당간지주로,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일성왕릉 찾아가는 길

저수지 지난다.

 

 

소나무 숲 멋지다.

일성왕릉 나온다.

 

 

逸聖王陵

 

신라 7대 일성왕(재위 134∼154)의 무덤이다.
왕은 북쪽 변방에 침입하는 말갈인을 막고,

농토를 넓혀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에게 금·은·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풍조를 멀리하게 했다.
왕릉은 높이 5.3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둘렀으며,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무덤 앞 2단 축대는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왕릉 옆면을 둘러본다.

 

 

일성왕릉에서 마을도로를 따라 쭉 올라가니

길이 끈긴다.

시간은 늦어지고

다시 돌아갈 여유도 없다.

그냥 숲길을 헤치고 간다.

 

능선으로 올라서면 등산로와 만나겠지.

그렇게 가다보니 등산로와 만난다.

이정표 만나니 더 반갑다.

 

 

등산로로 올라서니 안심이다.

불곡마애여래좌상 찾아간다.

 

 

 

 

불곡마애여래좌상 만난다.

이미 어둠이 내렸다.

랜턴을 켰다.

 

 

佛谷 磨崖如來坐像

 

경주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 부분까지 덮고 있다.

얼굴은 둥그렇고 약간 숙여져 있으며,

부은 듯한 눈과 깊게 파인 입가에서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인왕리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다.

양 어깨에 걸쳐입은 옷은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는데,

옷자락이 물결무늬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석불은 경주 남산에 남아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달이 떴다.

보름달이다.

음력 14일

달보니 기분 좋다.

 

 

산길 내여와서 탑곡 마애불상군 찾아간다.

 

옥룡암 뒤편에 있다고 한다.

이미 어둠이 깊어졌고

절집으로 들어서니 보살님이 묻는다.

죄송

양해를 구하고 대웅전 뒤편으로 올라간다.

 

 

탑곡마애불상군

사실 이곳은 꼭 오고 싶었다.

바위에 새겨진 탑이

황룡사9층목탑으로 추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밤에 오다니

 

 

塔谷 磨崖佛像群

이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각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아쉽다.

랜턴을 켜고 보고 있는 데

전체적인 윤곽을 볼 수 없다.

다음에 다시 와야 겠다.

 

 

옥룡암 나와 미륵곡석불좌상 보러 간다.

보리사 앞에 서니

문을 닫았다.

더이상 볼 수 없다.

되돌아 나온다.

 

도로변을 따라 걷는다.

지친다.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 앞에서 쉰다.

하루종일 배낭메고 걸었더니 등짝이 아프다.

 

마지막으로 정강왕릉, 헌강왕릉 가야 하는 데.......

이제 그만 하자.

어둠 속에서 의미없다.

다음에 와야겠다.

 

 

통일전 왔다.

 

 

남산 둘레길 걸었다.

24.3km, 10시간 22분

아침 일찍 시작해서 밤이 되어 끝났다.

 

정식적으로 길을 낸 곳이 아니었다.

아주 힘들었다.

거리가 길어서가 아니고

길에 대한 이정표가 없다.

남산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이정표나 리본 만 있었어도 시간이 많이 줄었을 거다.

 

낮에 다 볼 수 있었는 데

동남산 지역 문화재를 보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루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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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28. 남산 둘레길 걷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