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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경주 신라 천년고도를 걷다. 계림, 향교, 월정교, 월성

by 솔이끼 2023. 10. 22.

 

2023. 10.14.

경주 여행

계림, 경주향교, 월정교, 월성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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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를 구경했다.

꽃밭이 있어 즐거웠다.

꽃밭으로 갔다가 되돌아왔다.

 

계림으로 이어진 길을 들어선다.

 

 

계림 가는 길

고분들이 여전히 많다.

 

옛 신라는 월성과 대궁 사이

주작대로를 놓고 한쪽에는 고분을 배치했단다.

 

 

계림(鷄林)으로 들어선다.

말그대로 숲이다.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雞林)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무려 2천년 이상된 숲이다.

설화를 믿는 다면

 

 

계림 밖에는 고분이 있다.

 

 

오!

내물왕릉(奈勿王陵)이다.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고분이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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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돌아나오니 경주향교가 있다.

생각지 않았던 곳

 

 

이곳에는 요석궁이 있었고

이물을 마시고 설총을 낳았다는 설화가 있단다.

 

 

향교(鄕校)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가교육기관이다.

 

이 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다시 지었다.

이어서 선조 37년(1604)에 동무와 서무를 짓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더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대성전은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으로 위엄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겹처마 맞배집이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대성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명륜당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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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를 나와

커피 한 잔 마시고

월정교로 향한다.

 

 

웅장하다.

다리를 이렇게 멋있게 만들 수 있다니

비록 복원한 거지만

신라왕들의 위세를 알 게 해준다.

 

 

월정교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년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10여 년간의 조사 및 고증과 복원을 진행해

2018년 4월 모든 복원을 완료했다.
2013년 교량복원을 먼저 마치고,

이후 다리 양쪽의 문루(門樓)를 마저 지었다.
문루 2층에는 교량의 복원과정을 담은 영상물과

출토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낮에는 월정교의 자태를 오롯이 볼 수 있어 좋고,

밤의 월정교는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월정교 앞에 설치된 징검다리에서 월정교를 바라보자. 

강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월정교를 담을 수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다리 너무 멋지다.

 

 

예전 교각 일부만 남아 있었다는 데

이렇게 복원을 할 수 있다니

놀랍다.

 

이런 걸 보더라도

완전 훼손된 문화재는 고증을 거쳐 복원을 했으면 좋겠다.

 

 

다리로 들어간다.

지붕이 있는 다리

참 고급스럽다.

 

현재 우리나라도

경제수준이 올라가면서

육교에 지붕을 덮고 있다.

 

 

반대편으로 나왔다.

현판 이 더 멋지다.

 

 

사진 한장 남긴다.

 

 

다시 되돌아 간다.

옛날에는 마차도 다녔겠다.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어디 궁궐 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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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 바로 옆

월성(月城)으로 간다.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월성 위를 걸어간다.

아래로 연못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연못이 아니었다.

방어시설인 해자란다.

 

 

월성은 토성이다.

언덕같은 느낌

성 안은 궁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나무와 터만 남았다.

 

 

성벽에서 바라본 풍경

해자 건너편으로 건물지도 있다.

옛 영화가 사라진 터

 

 

성벽을 따라 걷는다.

소나무 숲이 좋다.

 

 

나름 멋진 길이다.

걷기 좋은 길

 

 

바람이 거칠다.

평지를 지나 성벽을 치는 바람

 

 

해자와 성벽

성 위에 자리잡은 소나무

성 위로 난 길

서로 구분을 한다.

함께 하지 않겠다고

 

 

그 위에 사람이 선다.

천년 세월을 느끼려고

영화로운 천년

허무한 천년

 

 

소나무만 힘차게 서 있다.

 

 

성벽 아래로 내려선다.

유적발굴이 한창이다.

천년이 지난 지금

허무를 찾고 있는 건 아닌 지

 

 

석빙고다.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성벽을 내려온다.

오래 걸었다.

 

봉황대에서 부터 노성동고분군 지나

대릉원, 첨성대, 계림으로

월정교에서 월성을 따라 걸어왔다.

이제 차를 가지러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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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

많이 걸을 생각해야 한다.

걸어가다 보면 천년 세월을 느낀다.

 

경주는

영화로운 천년을 지냈고

잊혀진 천년을 보냈다.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백년

그 후 잊혀지는 데.......

일년, 삼년, 십년.......

사는 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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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14. 경주를 걷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