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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경주 남산 둘레길 1 - 칠불암 가는 길. 통일전에서 고위봉 올라 삼릉까지

by 솔이끼 2023. 11. 6.

 

2023. 10. 28.

경주 남산 둘레길(이야기 하나)

칠불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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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산행이 아니라

둘레길 걷고 싶다.

 

남산문화유적지구

남산 주변으로 있는 문화재를 보면서

하루 정도 걸으면 좋겠다.

 

자료를 검색하니

남산 둘레길 있다.

정식적으로 난 길이 아닌

마니아들이 만들어 낸 길

남산 주변으로 문화재를 보면서 29km 정도 걷는 길

 

걸어보자

 

 

경주 남산 둘레길 걸어간 길

총 24.3km, 10시간 22분.

 

 

남산 둘레길 걷기 시작은

통일전으로 잡았다.

주차장이 무지 넓어서 좋다.

 

 

도는 방향은 시계방향이 좋다.

심장 가까운 곳으로

이정표에 칠불암 방향이 있다.

 

 

가을이 살짝 찾아온 길

 

 

첫번째 만난 문화유적

서출지

신라시대부터 있던 연못이다.

 

나는 서출지라고 하는 이유를 조금 알고 있어서

'서'자가 쥐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자는 글씨를 말하는 거다.

조금은 민망

 

 

書出池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연꽃이 피어 있으면 더 좋을텐데

 

 

무량사라는 절집 지난다.

최근에 지어진 절인가 보다.

내부는 단정하게 관리하고 있다.

 

 

탑 2기가 멋지게 서있는

남산동 동서삼층석탑 만난다.

 

 

먼저 만난 서탑

깔끔한 삼층석탑이다.

기단석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신중상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멋진 탑이다.

 

 

南山洞 東·西 三層石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部)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단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 동·서 두 탑은 각각 양식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흔치않은 모습이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마주 서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동탑은 정말 특이하다.

기단석도 크기가 다른 돌을 2단으로 쌓은 것

옥개석 윗면인 낙수면까지 층을 만들어 놓은 것

즉 옥개받침과 낙수면이 대칭적인 형태

색다른 모양의 삼층석탑 본다.

 

 

마을길 걸어간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만난다.

단아한 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가운데로 도로가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傳 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

경주 (전)염불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은

2003년과 2008년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를 거쳐,

8세기 초반에 창건되어 12세기에 폐사된 사찰로 추정된다.

 

이 사지에 위치한 동ㆍ서 삼층석탑은

후기신라시기인 8세기 전반에 건립된 5.85m 높이의 삼층석탑이다.

두 탑은 모두 상, 하 2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대부분 사라지고 노반석(露盤石, 탑의 상륜부를 받치는 돌)만 남아 있다.

 

동탑은 1963년에 불국사역 광장으로 이전되었던 것을

2009년 사지 정비와 함께 원위치에 이전 복원되었으며,

탑지 발굴조사 결과

서탑과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초부를 추가로 조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서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을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탑과 함께 원위치에 복원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동탑과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두 탑은 복원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부재들이 사용되었으나,

전체적인 조영 기법과 양식, 석탑 기초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등을 고려할 때,

8세기 전반에 건립되어 후기신라 석탑의 전형과 양식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고려할 때

국가지정국가유산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칠불암 등산로 입구다.

칠불암까지 2km 정도

 

 

조경회사 개인소유지?

 

 

등산로는 아주 좋다.

숲길이다.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집 보인다.

칠불암 다와가는 가 보다.

 

 

칠불암 오르는 계단

 

 

칠불암이다.

외국계 스님이 염불을 왼다.

 

 

칠불암 알현한다.

 

 

의자에 앉아 칠불암 불경외는소리와 분위기에 빠진다.

 

 

慶州 南山 七佛庵 磨崖佛像群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四方佛)을 모셨으며,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화려한 연꽃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크기가 같으며,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다른 바위 4면에 새긴 사방불도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원래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이곳 주변에서

당시의 구조물을 짐작케 하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칠불은 후기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광배도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준다.

돋을새김한 불상들 표정이 살아있다.

부처가 앉아있는 연화대좌도 편안하게 보인다.

 

 

보는 방향에 따라 불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쪽에서 보면 좀 근엄하게 보인다.

 

 

 

좁은 공간

보통 생각이라면

앞에 있는 사면불 바위를 없애야 하는 데

불상을 하나라도 더 새기기 위해

앞에 가리고 있는 바위마저 부처를 새겨 놓았나 보다.

 

 

칠불암에서 부터는 하늘이 보이는 작은 소나무 숲길이다.

경주평야가 보인다.

여기서 경주뜰을 바라보니

한 국가의 도읍이 될 만한 터다.

좋은 곳이다.

 

 

칠불암 조금 위에 마애보살상이 있다.

신선암 마애보살상이다.

 

神仙庵 磨崖菩薩半跏像

높이 1.4m의 마애보살반가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에 곧바로 선 남쪽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구름 위의 세계에서 중생을 살펴보고 있는 듯하다.

오른손에는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천의(天衣)는 아주 얇아 신체의 굴곡이 사실적으로 드러나 보이며

옷자락들은 대좌(臺座)를 덮고 길게 늘어져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광배(光背) 자체를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보살상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며,

후기신라시대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반가사유상처럼 앉아있는 데

여유부리고 있는 모습이다.

 

 

신선암 마애불에서 칠불암이 내려다보인다.

 

 

남산 최고봉인 고위봉으로 가는 길

 

 

완만한 소나무 숲길이다.

 

 

고위봉 나온다.

494m

정상 주위는 나무로 둘러쳐져 있어

조망은 없다.

그늘이 좋다.

 

내려가는 길은 이무기능선과 열반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열반재로 내려선다.

 

 

열반재

 

 

열반곡 전설을 적어 놓았다.

 

 

계곡으로 내려선다.

계곡에 물은 없다.

 

 

관음사 나온다.

관음사 뒤편에 동물모양 바위 있다는 데

곰바위, 이무기바위 등등

아무리봐도 동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용장마을로 나온다.

 

용장마을에서부터 삼릉까지는 도로를 따라 간다.

자전거도로가 있어 안전하다.

 

2.8km 정도 거리

도로변 걷기는 힘들다.

 

 

경애왕릉 표지석 보인다.

 

 

경애왕릉으로 들어가는 길

 

 

왕릉은 역시 소나무

아래가 정리된 소나무 숲

그림자가 만들어낸 풍경

멋진 모습이다.

 

 

景哀王陵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이 되던 해에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이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일반무덤와 같아서 별다른 특징은 없다.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되어있다.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소나무 숲 멋지다.

소나무 숲은 삼릉으로 이어진다.

 

 

삼릉이다.

소나무 숲에 싸인 왕릉

삼릉이니 왕릉이 3개

 

 

拜洞 三陵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 경주시 소개글에서 -

 

 

삼릉은 소나무 숲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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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28. 경주 남산 둘레길 걷다.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