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 지리산

남명 조식 선생의 혼. 산천재

by 솔이끼 2015. 8. 18.

 

 

2015.9.6.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산청 사리마을

그길 양편으로 남명 조식 유적지가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산천재로 들어선다.

 

 

 

 

산천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남명선생시비가 섰다.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

 

천섬 돌아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아래 설명으로는

'이 시는 남명선생께서 예순한 살 때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인 시로서 남명선생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적어 놓았다.

 

나는 해석이 안되니 남명선생의 정신세계를 따라갈 수 없다.

 

 

 

 

 

산천재는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고 작은 문이 있다.

 

 

 

 

문으로 들어서면 매화나무 한그루와 산천재라는 이름을 단 집.

유명한 이름과는 달리 소박하다.

정면 세칸 집이다.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은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났다.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인 명종 16년(1561)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

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당시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일명 '남명매'다.

산천재의 뜰에 있는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454살이나 된다.

 

매화가 필 때 다시 오고 싶다.

 

 

 

 

산천재는 지리산을 보고 있지 않다.

덕천강을 바라본다.

 

 

 

 

같은 이름을 두번이나 써 놓았다.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다.

 

 

 

 

측면은 두칸이다.

 

 

 

 

남명매가 늙어간다.

매화나무가 몸은 상해도 기상이 살아서 힘차다.

 

 

 

 

바로 옆으로 덕천강이 흐른다.

 

산천재와 남명매를 보면서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세계를 본다.

 

깔끔하고 꾸밈없는 학자

치장이 없는 삶

 

이 곳에 든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어야...

 

 

 

덕천강 가에서 바라본다.

 

산천재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덕천강을 바라본다.

그게 맞다.

산이 좋다고 산만 바라보고 살 수 있으랴.

흐르는 강을 보고 있어야...

 

.

 

.

 

.

 

2015.8.6. 산청 산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