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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극락세계를 펼쳐 놓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by 솔이끼 2016. 10. 13.

2016. 9. 22.

 

영주 부석사

너무나 가고 싶었던 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 보고 싶었던 절

 

부석사로 들어간다.

 

 

 

 

부석사 가는 길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간다.

사과밭고 주변에 많다.

사과가 익어가는 계절은 탐스럽다.

 

 

 

 

 

 

 

당간지주가 엄청 크다.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부석사 당간지주다.

부석사 창건 때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

 

 

 

 

천왕문을 지나면

절집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길

중간에 계단을 두어 단조롭지 않게 만든 길

2층 누각이 꽉 채우며 막아선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조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다.

 

부석사라 이름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단다.

 

 

 

 

봉황산부석사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법종각이라는데

건물이 길게 자리를 잡았다.

 

 

 

 

종은 안보이고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다.

 

 

 

 

 

 

 

길은 살짝 비틀어서 이어지고

2층 누각이 또 있다.

 

 

 

 

계단을 올라간다.

이름표를 두개 달았다.

안양문과 부석사

 

 

 

 

 

 

 

 

 불교에서 '安養'은 '極樂'을 말한다.

안양문은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누하진입

절집을 들어설 때

누각 아래로 들어가게 만들어 놓은 것

 

안양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선다.

 

 

 

 

누각 위는 이런 풍경

 

 

 

 

누각에 안양루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안양루 천정

 

 

 

 

 

 

 

누군가가 그랬던 것 같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안양루에서 바라 본 장쾌한 산너울이라고...

 

아래로 펼쳐진 산너울 풍경이 마음을 뻥 뚤어 버린다.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이다.

하대석은 평면 팔각의 귀꽃을 갖춘 팔엽복변연화문대이다.

상대석은 팔엽의 단판앙련인데 잎 안에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사면에는 각 1구씩의 공양미륵상을 배치하였다.

화사석 사면에 부조된 보살상이나 연화문, 받침각출 방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앞으로 배례석이 놓였다. .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첫 느낌

단아하면서 중후하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석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배치하였다.

 

기둥은 배흘림이 많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지붕 네 모서리에 활주를 받쳤다.

공포는 헛첨차 없는 주심포양식으로 내외2출목이며,

가구는 전·후퇴 9량집의 팔작지붕이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고 남향하는 건물의 서편에 불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장육의 아미타여래상을 동향하여 안치하였다.

 

 

 

 

신라 화엄종의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다.

 

안양(安養)은 곧 극락(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것이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단다.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냥 기대어 서 보고 싶었다.

 

부석사에 와 보고 싶었다.

책을 읽은 지는 20년이 넘은 것 같은데

너무 늦게 왔다.

 

 

 

 

 

 

 

배흘림 기둥은 그리스 양식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한다.

건축가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이라는 책을 보았다.

 

우리나라 목조건축이 발달해 온 과정을 엮은 책이다.

건축가의 필요에 의해

목조건축은 물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진화과정에서

처마와 각종 건축양식이 발전해 왔다고 한다.

배흘림기둥도 역시 주초와 기둥과의 발전과정의 하나로 분석해 놓았다.

 

다 떠나서

배흘림기둥은 단조롭지 않아서 좋고

건물이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문틈으로 엿본다.

근엄한 부처님이 좌정하고 있다.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고려시대 소조불상(흙으로 만들었다)이다.

 

내부 기둥도 배흘림기둥이다.

 

 

 

 

 

 

 

 

 

 

부석이다.

부석사의 유래를 말해 주는 바위

 

생각했던 것 만큼 신비로움을 부지는 않는다.

그냥 보통 바위와 같다는 느낌이다.

 

 

 

 

무량수전 옆 배나무

배가 많이 열렸다.

 

 

 

 

보물 제249호로 지정된 부석사 삼층석탑이다.

보통 석탑은 마당에 있는데

탑돌이 하기도 옹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연이 있게지만 그리 궁금하지는 않다.

 

 

 

 

 

 

 

삼층석탑 옆으로 길을 올라서면

조사당이 나온다.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비화다

의상대사 지팡이가 싹이나러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부석사 조사당은 이 절을 지은 의상조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고려 공민왕때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우왕 3년(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헛첨자가 있는 주심포계의 건물이다.

창호는 전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그 좌우에 광창이 있다.

 

 

 

 

건물은 작은데

지붕은 크다.

지붕을 엮은 서까래와 부연이 당당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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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서 있을 때

 

2016. 9. 22. 영주 부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