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둘러보기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by 솔이끼 2012. 3. 28.




강진에는 무위사가 있다.
절 이름이 좋다.
'무위'라니
모든 게 무위로 끝났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면???

절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말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난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물
이름도 극락보전이다.

첫인상은 깔끔
가까이 다가가면 기품이 넘치고
고개를 들어서 보면 장중함이 느껴진다.


사실 무위사는 극락보전을 보러간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
.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서기 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 만은 최근(1956년경)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본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서기 1476년)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
.


















내부로 들어가 볼까요?
.
.





무위사 극락전아미타후불벽화(국보 제 313호)

후불벽화를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 토벽(土壁)에 채색되어 있는 이 그림은
호화찬란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시대 초기의 새로운 수법이 나타난 걸작으로
국내에 현존하는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두 협시보살의 키가 부처의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쪽 좌우에 세명씩,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진 점은 고려불화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는 엄격한 상하구도의 고려불화와
보살과 나한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16세기 이후의 불화와도 다른 조선초기 불화의 특징이다.

원형도, 배(舟) 모양도 아니고 어깨 위가 잘록한 키(箕)모양의
아미타불 광배 또한 15세기부터 등장하는 것이다.


화기에 의하면
이 그림은 강노지 등 여러사람의 시주로 대선사 해련(海連)등이 그렸고
성종7년(1476)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화기가 분명하건만 그림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한 노승이 절에 찾아와 법당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더니
49일동안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노승은 법당에 들어가더니 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
한번도 나오지도 않고 음식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못참은 주지스님은 문틈으로 법당안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다 그린후
막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후불벽화 관음보살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무위사 후불벽화 아미타삼존도는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호화롭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전통을 이으면서
전체구도와, 광배, 부처의 머리 모양 등에서 조선초기의 특색을 보이는 걸작이다.

.
.





무위사 극락전내벽 사면벽화(보물 제1315호)

15세기 후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보존각내 벽화들은
1974년 극락보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벽화보존각에 별도로 모신 것이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내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휙휙 그려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비천선인도 등 총 29점이 유리장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중 아미타내영도는 흙벽에 채색된 것으로
사람이 죽을 때나 수행이 성숙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가 구름위에서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왕생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8보살 뒷편 상체만 그려져 있는 8비구는
다양한 얼굴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뭉게구름과 함께
생동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은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
고려불화의 양식이 짙게 나타나 있는 반면,

화면에 나한(羅漢)이 등장하는 등 세부묘사에서
조선초의 새로운 양식이 표현되어 있다.


현재 극락전 좌우 벽면에 그려진 아미타내영도와 설법도 등 2점은 모사본이며
원본은 보존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
.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후불벽화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화면 전체에 관음보살이 둥그스름한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화면의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노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의 주위에는 물결을 표시하여 바다위에 떠있는 모습인데 연판(蓮瓣)과 같은 모양의
대좌위에 서서 두 손으로 각기 정병과 버들가지를 살짝 잡고 있다.

넓적한 얼굴, 굵은 목, 넓은 어깨에서 남성적인 체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바람에 날리는 천의의 모습을 표현한 강약의 변화있는 묘선이 이루는 긴장감 넘치는 필치는 활달하고 유려하며,
흩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화면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강한 율동감과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다.

관음이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은 승복을 입은 노비구의 모습으로 보이며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자세와 표정은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염원이
매우 절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



.
.
.





보존각 안에 있는 진품 벽화들이다.

.
.








.
.
.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보물 제507호)

비의 제목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 영탑명병서`라 시작하여
비문을 지은 최언위와 글씨를 쓴 유훈률의 관직과 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을 따르면 선각대사의 법위는 형미,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 (882)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운 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의 심인을 받고 효공왕 9년 (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대사의 나이 41세때의 일이다.

비문은 `속년오십유승삼십유오우`라 하였으니
무위갑사에 머무른지 13년후 시작하였다.
또 말미는 `개운삼세차병우오월경인삭이십구일유무오립`이라 기록되어 있다.

입비년인 개운삼년은 고려정종원년(946)으로서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는 극락보전 서방 약 30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축담장내에 남향을 하고 있으며,
머리부분은 양각을 뚜렷이 조각한 용두로서 여의주를 머금은 입은 투조되어 있다.
거북등은 6각의 갑문을 양각하였고, 비좌 전후 2면에는 보은문, 양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양음각하였다.
이수는 복판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주위에는 반결용운문과 반결쌍용문으로 조출하였다.
명부의 조각기법은 당대의 타비에 비해 사실성의 경향을 띠었으며,
특히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
.







위에서 인용한 내용은 강진군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
.

2012. 2. 26. 강진 무위사에서...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