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4.
덕수궁 구경하다.
*
*
시청 앞 갈 일 있어
시간이 남았다.
덕수궁 들러본 지 10여년 흘렀나.
도로를 건너 대한문 들어선다.
덕수궁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것을
임진왜란으로 도성 궁들이 소실되자
선조 때(1593년)부터 임시궁궐로 사용했던 궁이다.
광해군 때(1611년) 경운궁 (慶運宮)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 때(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대한제국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1904년 대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때 덕수궁은 공원화로 훼손되었다.
현재는 훼손된 건물 들 일부를 복원하였다.
*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경운궁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1906년(광무 10) 문을 수리하면서 바꾸게 되었다.
- 궁능유적본부 소개글에서 -
대한문 들어서면 멀뚱한 문 서 있다.
광명문이다.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명’은 ‘밝음을 맞다’라는 뜻이다.
덕수궁 들어서면 어디서부터 봐야 할 지
너무 개방적인 궁이라
덕수궁은 크게 3개 영역으로 나뉘어 졌다.
침전과 거주공간
정전
그리고 석조전 등등
대한문 들어서면 광명문과 마주본다.
문이라야 담이 없어 개방된 문
문 지나면 침전이 강녕전 나온다.
함녕전 건물이 엄청 크다.
크지만 정갈한 느낌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1904년(광무 8)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으로 꾸며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들을 설치하였다.
함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궁능유적본부 소개글에서 -
뒤편은 역시 화계
화계는 계단식정원이다.
꽃이 만발했다.
화계에는 멋진 굴뚝이 서 있다.
경복궁도 창덕궁도 그러하듯이 덕수궁에도 멋진 굴뚝이 있다.
화계 오르는 계단 있다.
꽃 밭사이 오른다.
독특한 처마를 가진 건물 있다.
정관헌
정관헌(靜觀軒)의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관헌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인데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포치가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정관헌 뒷편
정관헌에서 바라본 풍경
*
*
중화문으로 내려온다.
참 생뚱맞은 풍경이다.
문 옆 담장이 없다.
중화문(中和門)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함께 지어진 문이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답도에는 용을 장식하였다.
원래 문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동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한제국 황궁 정전의 문이 허전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중화문 사이로 중화전을 바라본다.
그러니 조금 궁 같이 보인다.
문을 들어서면
완전 털린 느낌
대한제국 황궁이 이렇게 허술하게 되어 버렸다니
예전에 왔을 때 몰랐는 데
다시 와서 보니
모두 발가벗고 있는 느낌이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광무 6)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중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된 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다른 정전의 답도와 다르게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에 지어진 건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마당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서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 궁능유적본부 소개글에서 -
중화전 뒤편에 2층 건물있다.
석어당(昔御堂)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는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은 보존하였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석어당 옆에는
건물 두개가 연결되어 있는 멋진 건물 있다.
즉조당과 준명당이다.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즉조’는 ‘왕의 즉위’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왕위에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 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가
1902년(광무 6)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렸다.
이후에는 고종의 후궁인 황귀비 엄씨가 생활하다가 1911년에 세상을 떠난 곳이다.
준명당(浚眀堂)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즉조당과 함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복원하였다.
1916년에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궁능유적본부 소개글에서 -
정전인 중화전과 침전인 함녕전을 나누는 문
석어당 뒷 모습
*
*
석조전으로 간다.
멋진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 시절
이렇게 큰 건물을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 시설이 있었고,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1910년에 준공된 후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 궁능유적본부 소개글에서 -
황제의 꿈이 깃들여 있는 곳
여전히 한쪽은 미술관으로 쓰고 있다는 것
정전인 중화전을 바라본다.
서양식 연못
해시계도 있다.
석조전은 17:00까지 입장할 수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좀 더 일찍 왔으면 안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로마식 건물 형태가 특이하다.
기둥 크기도 어마어마 하다.
황제의 꿈은 원대하였으나......
석조전 옆 건물
미술관으로 사용 중
석조전 난간에서 중화전을 바라본다.
황제의 궁은 빌딩 숲에 갇혀있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으로 바뀌고
황제의 꿈은 시민들의 꿈으로 바뀌었다.
석조전 뒤편에 또 하나의 큰 건물 있다.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은 ‘덕이 도탑다’라는 뜻이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 순종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돈덕전은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2023년에 재건하였다.
최근 복원된 건물이다.
크기가 엄청나다.
대한제국의 번영을 꿈꾸었던 곳
뒤편 숲속을 걸어 나온다.
멋진 연못 본다.
철쭉이 만발하였다.
대한제국은 나라의 힘이 없어서 망했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덕수궁을 보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합리화 시킨 논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는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
*
*
2025. 4. 24. 서울 덕수궁 구경하다.
길 위에 서 있을 때
'문화유산 둘러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성곽길 - 한양도성 순성길 걷기 2. - 동대문 출발, 남산, 숭례문 지나 서대문 동대문까지 (0) | 2025.05.12 |
---|---|
서울 성곽길 - 한양도성 순성길 걷기 1. - 서대문 출발, 인왕산, 백악산, 숙정문 지나 동대문까지 (0) | 2025.05.09 |
남원 광한루 - 산수유꽃 필 무렵 (0) | 2025.04.16 |
산청여행 - 아름다운 한옥마을 남사예담촌. 마을 돌담길따라 고택구경 (3) | 2024.09.27 |
합천 여행 - 삼가면 남명 조식의 흔적 찾아서 - 조식생가지, 뇌룡정, 용암서원 (3) | 202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