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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여행 - 삼가면 남명 조식의 흔적 찾아서 - 조식생가지, 뇌룡정, 용암서원

by 솔이끼 2024. 9. 19.

 

 

2024. 9. 9. 가을여행 4일째

합천 삼가면 조식 선생 생가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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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면에 들렀다.

점심 먹으러

식당이 온통 한우고기집이다.

점심부터 고기 구워 먹기는 참

소고기국밥 먹었다.

고기는 샀다.

집에서 구워 먹을 만큼

 

 

남명 조식 생가지 찾아간다.

그 유명한 조식이 합천 삼가면에서 태어났단다.

 

 

돌담이 정겹다.

돌과 흙을 반반 섞은 담

 

 

이정표 있다.

남명조식선비길이라는 데

날이 더워 걷기는 힘들다.

 

남명조식선비길 - 거리 : 2.5km, 도보 : 1시간

선비길은 삼가면 외토리 어귀 50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시작된다.

한가로운 풍경 뒤로 조선시대의 선각자이자,

퇴계 이황(1501~1570)과더불어 영남권 대표 선비인 남명 조식(1501~1572)의 생가터가 있다.

조식 선생은 벼슬살이는 않고 초야에서 후학을 기르고 곧은 소리 상소를 올려 이름을 떨쳤다.

선생의 경(敬)과 의(義)의 정신을 기리는 흔적인 뇌룡정(雷龍亭), 용암서원(龍岩書院)등을 따라가다보면,

혼란한 오늘날 조식 선생과 같은 올곧은 선비 정신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한편, 삼가는 육질이 부드럽고 신선한 한우를 맛볼 수 있는 명소로 이름이 높다.

질 좋은 한우는 남명조식선비길에서 놓칠 수 없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 합천군 소개글에서 -

 

 

돌담길 멋지다.

아주 막담이다.

대중없이 돌로 쌓았다.

 

 

골목 끝에 있다.

 

 

남명조식선생 생가지(南冥曺植先生生家址)

조선 중기 학자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대학자 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그와 쌍벽을 이루었다.

저서로 『남명학기유편』, 『남명집』 등이 있으며

특히 의(義)와 경(敬)을 존중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다.

조식이 죽은 20년 뒤인 선조 25년(1592) 임잰왜란 때에는

제자들인 정인홍·곽재우 등 10여명이 의병을 모아 선생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 합천군 소개글에서 -

 

 

조식의 생가는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으로 철거되었다가,

현재는 건물을 복원하여 정비 중에 있다.

 

웬 정신없는 소리

새마을 운동으로 철더 되다니......

 

 

새로 복원한 집이라 정감이 없다.

복원이 엉터리다.

관광지 개발하듯 해놓았다.

 

 

생뚱맞은 전시물까지

 

 

다행스럽게도

집 안에 큰 상수리나무가 남아있다.

 

 

너무 단정한 석축위에

곧은 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마저 없었으면 민속촌 온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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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정감이 없어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마을 돌담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래도 그냥 갈 수 없어

뇌룡정 찾았다.

 

 

뇌룡정(雷龍亭)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남명 조식이 지은 정자로,

1900년대 초 허위 등이 고쳐 지었다.

조식은 48세 때 합천군에 뇌룡정과 계복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뇌룡정이란 장자에 나오는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에서 따 온 것이다.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

정자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 합천군 소개글에서 -

 

 

건물배치가 특이하다.

담장을 네모로 둘렀고 양측면에 협문을 내었다.

 

 

1900년에 고쳐 지었다고 했다.

건물 부재가 옛건과 새것이 섞여 있다.

 

 

뇌룡정 건너편 용암서원 있다.

전주부윤에게 쓴 편지의 일부를 새겨놓았다.

학자로서 곤궁한 삶을 친구에서 편지형식으로 쓴 내용이란다.

  

 

단성현감 파직 상소문이란다.

임금이 현감을 제수했는 데 사양하는 내용?

길어서 못 읽겠다.

날이 너무 뜨겁다.

 

 

용암서원으로 들어선다.

 

 

용암서원 묘정비

 

 

용암서원 묘정비(龍巖書院廟庭碑)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를 향사하고 있던 용암서원의 묘정에 세웠던 비석이다.

용암서원은 1576년 가회면의 회현(晦峴) 아래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회산서원(晦山書院)의 후신으로,

1601년 봉산면에 세워졌던 향천서원(香川書院)이 1609년 사액되면서 얻은 명칭이다.

이 묘정비는 조선 순조 12년(1812)에 세워진 것으로

가로 80㎝, 세로 180㎝, 폭 25㎝이다.

비의 형식은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위에

태극무늬의 직사각형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삼가현감(三嘉縣監) 오철상이 해서체로 썼다.

이 묘정비는 서적 이외에 용암서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유일한 것으로서

용암서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가치가 있다.

- 합천군 소개글에서 -

 

 

화난 거북이가 비석을 이고 있다.

 

 

용암서원 마루에 앉아 뜨거운 초가을 즐긴다.

가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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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9. 9. 합천 남명조식생가지 갔다가

 

길 위에 서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