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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광장에서 시작하는 여수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

by 솔이끼 2014. 5. 18.

 

 

여수

이순신광장에는 이순신장군이 서 있다.

여수의 관광이 시작되는 곳

 

 

 

 

 

진남관은 여수의 상징이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자

삼도수군통제영의 시작이 된 곳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을 가진 진남관

지방 관아건물로는 최대 크기란다.

옛날 좌수영 객사 건물이다.

한때 학교 건물로 쓰는 등 훼손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국보 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남관 담을 타고 걸어가면

벽화골목으로 가는 다리를 건넌다.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이 시작된다.

 

 

 

 

이순신 장군의 어린시절부터 벽화는 시작된다.

 

 

 

 

 

 

 

우리나라 최초 세계챔피언인 김기수 선수가 훈련을 하던 체육관이 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단다.

 

 

 

 

 

 

 

 

 

 

 

 

 

고소대다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여수군읍지』의 「고소대중수기(姑蘇臺重修記)」는 다음과 같다.

"여수 땅은 호수와 산이 옷깃처럼 둘러 있어,

 예로부터 정자로서 올라 볼 만한 명승지가 많은데,

 고소대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정자에 올라 보지 않아도 이름이 벌써 좋다.

또 한산사(寒山寺)라 부르는 절이 고소대의 서쪽에 떨어져 있으니

 가까이서 바라보면 종소리가 은은하여 들을 만하다.

 

그 대(薹)를 ‘고소(姑蘇)’라고 이르는 것은 이 까닭일지어다.

내가 전에 고소대에 올라서 시험 삼아 바다를 바라보니,

산봉우리들이 은근히 연운(煙雲)이 아득히 아른거리는 속으로 잠겼다 나왔다 함이 보였으며

장사배와 고기잡이배들이 종청으로 푸른 나루, 푸른 파도 가운데 벌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소대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만약에 바위가 들린 곳에 조수가 일면 배를 매던 옛 풍진을 상상할 수 있는데,

경도(鯨島)엔 대나무가 늙어가는 칼을 씻던 옛 언덕이 여전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옛 전장을 조상하는 회포를 갖게 한다.

이것은 바로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이른바, ‘감상이 절정에 다달아 슬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臺)의 터전에서 메워진 해자와 허물어진 초석을 굽어보면 눈에 가득 근심이 걸리니,

이것은 또 “능허대기(凌虛臺記)의 흥폐(興廢)가 서로 찾아오는 운수다.”라고 말하던 것이다.

조심하던 사람들이 오래도록 개축할 것을 도모했는데,

생각하니 군무(郡務)가 얽혀서 손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성황(城隍)과 제단(祭壇)을 세우는 일로 인한 그 나머지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여 대(臺)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수했다.

 

수서기(首書記) 김준혁(金俊赫)이 그 일을 맡아 열흘이 못 걸려 완공을 보았다.

이에 다함이 나타나니 운물(雲物)이 더욱 빛이 났다.

나는 공무가 끝나고 한가한 겨를이 있으면 두서너 사람들과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바람을 맞으며 짐짓 이 기(記)를 쓰노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좌수영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여수경찰서장 마쓰키[松木]가

1942년 봄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대첩 비각을 헐고 대첩비와 타루비를 반출했던 것을

 1946년 경복궁 뜰에서 김수평이 발견하여 1948년 5월 24일 여수에 복구하였다.

좌수영대첩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좌수사, 황해병사를 지낸 유형(柳珩)이 돌을 보내

김상용(金尙容)이 전을 쓰고,

이항복이 비문을 지었으며,

비문은 김현성(金玄成)이 새겼다.

끝부분에 ‘만력사십삼년오월립(萬曆四十三年五月立)’이란 명문이 있어

1615년(광해군 7)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좌수영대첩비는 세밀하게 장식한 기단과 귀부가 1매의 돌로 구성되었다.

귀부에는 세장한 다리와 형식적인 머리, 그리고 등에는 육갑문이 표현되었다.

그 위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이수는 아래에 연화문이, 앞면은 중앙에 여의주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구름에 둘러싸인 채 다투는 형상이다.

뒷면은 구름 무늬와 꽃 무늬가 조식되었고, 맨 위에는 꽃 무늬의 보주가 있다.

좌수영대첩비는 국내 비석 가운데 최대로 길이 3.6m, 폭 1.27m, 두께 27㎝에 달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죽은 지 6년 후인 1603년에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좌수영대첩비 오른쪽에 있는 타루비의 비좌 아래는 땅에 묻혀 알 수 없으나

비좌는 장방형으로 앞면과 옆면에 네모꼴 안상을 마련하였고,

그 안에 풀 무늬와 여의주 무늬를 조각하였으며, 윗면에는 중판의 연화문을 새겼다.

옥개 부분에도 앞면과 옆면에만 나선형의 구름 무늬가 표현되었을 뿐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 없이 처리되었고

그 위에는 반원형의 연봉형 보주가 있다.


타루비에는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공순신을 위하여 짧은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말하니라.

 대개 중국 진나라의 양양(襄陽) 사람들은 양호를 생각하며

그 비를 바라보면서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니라.

만력 31년(1603) 가을에 세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본격적인 벽화골목으로 고고~씽

 

 

 

 

 

 

 

 

 

 

 

 

 

 

 

 

 

 

 

 

 

 

 

 

 

 

 

 

 

 

 

오포대

정오를 알리는 포를 쏘던 곳이란다.

 

 

 

 

 

 

 

여수항에 배가 지나간다.

 

 

 

 

 

 

 

 

 

여수가 배출한 불세출의 만화가 허영만 선생님

타자, 각시탈, 무당거미, 손오공 등등

 

 

 

 

 

 

 

 

 

 

 

 

 

 

 

 

 

 

 

 

 

 

 

 

 

 

 

 

 

 

 

 

 

 

 

 

 

진짜 벽화다

벽에 화분을 심고 꽃을 심었다.

 

 

 

 

 

 

 

 

 

 

 

 

 

벽화골목은 여수해양공원으로 내려선다.

선창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다.

여수는 항구다.

 

 

그렇게 걷다보면 다시 이순신광장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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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19. 여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