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 둘러보기

순천 검단산성과 순천왜성 - 임진왜란 마지막 격전지 - 조선, 명나라, 일본 군의 전투 현장,

by 솔이끼 2022. 11. 18.

 

2022. 11. 11.

순천 검단산성과 왜성

 

.

 

순천에는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현장이다.

임진왜란 막바지

왜군은 왜교성에서 버티고 있고,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육상에서는 검단산성, 바다에서는 묘도 앞바다에서 막아서고 있었다.

 

 

 

검단산성 찾아간다.

순천에서 여수가는 국도에서 충무사 방향으로 벗어나면

도로변에 검단산성 이정표 있다.

 

 

 

산성 오르는 길

넓은 흙길이다.

차도 다닐 수 있는 정도

 

 

 

가을

낙엽이 깔린 길을 걷는 기분 좋다.

남쪽이라 아직 푸른 나무들이 많다.

 

 

 

길이 묘하게 친근하다.

넓은 길인데도 주변 나무들이 숲을 만들어 준다.

 

 

 

검단산성 안내판 있다.

사적 제418호다.

 

*검단산성은

*검단산(138.4m)의 정상부에 위치한

*테뫼식산성(산봉우리에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산성)으로

*성곽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430m다.

*축성연대는 6~7세기 경 백제시대 축성한 석성으로 판명되었다.

 

 

 

성벽이 특이하다.

마치 제주 오름을 보는 것 같다.

오목 들어간 곳이 문지란다.

문지는 문이 있었던 자리다.

 

 

 

빙 돌아서 올라간다.

 

 

 

 

 

 

올라서면 이런 풍경 보인다.

민둥산?

 

 

 

돌무덤이라는 안내판 있다.

임진왜란 때

성을 지키던 개를 묻었던 무덤이라는 데

믿음이 안간다.

 

 

 

검단산성에서 순천왜성이 보인다.

한 가운데 평형한 언덕이다.

천수기단 터가 보인다.

 

*검단산성은

*임진왜란 막바지(1598년)

*조명 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성으로 

*당시 조명 연합군은 명나라 제독 유정이 이끄는 명군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천명 정도의 규모였다.

 

검단산성 규모로 보아

전체 병력이 주둔은 어려웠고

지휘부만 성에 주둔하고

군사들은 순천 넓은 들판에 주둔했을 것으로 보인다.

 

*약 2.7km떨어진 왜교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만 4천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석성 흔적이 남아있는 성벽이다.

토성처럼 보이는 데

백제시대 쌓은 석성임이 확인 된다.

 

 

 

검단산성에는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옛 건물의 잔해인 기와조각은 많이 보인다.

 

 

 

쉴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아 잘 정돈된 산성 터 바라본다.

옆으로 보이고 그 너머로 순천시내가 보인다.

 

 

 

성은 봉우리를 두른 게 아니라 경사진 지형을 빙 둘렀다.

비탈진 형태다.

 

 

 

아래로 성벽 옆 큰 우물 보인다.

 

 

 

우물 안에는 뽕나무 한그루 자라고 있다.

 

 

 

안내판에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 뽕나무란다.

뽕나무가 임진왜란 때 우물에 빠진 아이를

가지를 늘어뜨려 구해줬다고 하는 데

역시나 믿음이 안간다.

 

우물 구조는 백제시대 석축기법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시 성을 따라 올라간다.

 

.

 

.

 

.

 

순천왜성으로 왔다.

왜교성으로도 부른다.

 

당시 해자가 있고 예교로 연결되어 있는 성 구조 때문에 왜교성이라고 불렀다.

 

 

 

주차장 돌에 큰 그림 있다.

'정왜기공도' 일부 그림이다.

당시 왜교성 전투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 놓았다.

 

가운데 본성, 해자 오른쪽은 외성이고

외성 밖에서는 조명연합군이 공격하고 있다.

아래쪽 군사들이 망토를 두른 모양이 명나라군 같다.

 

왜교성은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왜군을 몰아내려는 조명연합군과

해상으로 탈출하려고 저항하던 왜군이

대치하면서 전투를 벌였던 최전선이었다.

 

당시의 전투는

1598년 음력 9월 20일부터 10월 7일에 걸쳐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얽혀 싸운 격전으로

순천 왜교성 전투라고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정왜기공도병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궁금해서 정왜기공도를 검색하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원본이 아니란다.

원본은 정왜기공도권으로 두루마리 그림이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은 정왜기공도병으로 병풍이다.

 

순천왜성에 그려진 정왜기공도는 오른쪽 상단부분이다.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는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다.

*임진왜란 마지막(1598) 3개월간 왜교성전투와 노량해전을 그린 것이다.

*당시 명군을 따라왔던 화가가 두루마리에 그린 것이다.

 

 

 

수로 옆을 따라 걸어가면 문지가 나온다.

본성 문이다.

문 오른편으로는 해자와 예교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잔교 밖 외성부분은 밭으로 개간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본 특유의 축성양식이 보인다.

모서리에 큰 돌로 쌓고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

 

 

 

 

 

 

문지 위에 올라가 본다.

 

 

 

순천왜성은 남파랑길이 지나간다.

 

 

 

두번째 문지 지난다.

 

 

 

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오른쪽은 바로 성으로이어지고

왼쪽은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성 옆문으로 들어간다.

 

 

 

다시 문지를 또 지난다.

겹겹히 성벽을 쌓고 문을 만들어 방어에 쉽게 되어 있다.

 

 

 

철옹성 같은 느낌

성을 보면서 올라가다보니 화가 치민다.

일본 침략군이 쌓은 성이 왜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을까?

조명연합군이 주둔했던 검단산성은 석축이 땅에 묻히고 흔적만 남아 있는 데.

 

 

 

 

 

 

마지막 성벽이다.

 

 

 

역시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 정상부에 올라서면 넓은 터가 나온다.

빙둘러 성벽을 긴 네모꼴로 쌓았다.

올라 들어오는 문은 두개

 

 

 

왜성 맨 끝에는 천수기단이 있다.

망루가 있던 자리다.

 

 

 

 

 

 

 

 

 

천수기단 위에는 초석들이 있다.

옛 망루가 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수기단에서 검단산성이 바라다 보인다.

중앙에서 왼편으로 산정부위가 평평한 산이 검단산성이다.

검단산성에는 조명연합군 3만 6천명이 있었다.

 

 

 

해상부분은 매립이 되어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앞에보이는 산이 묘도다.

당시 해상에는 명나라 진린과 조선 이순신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이

1만5천명 규모로 막아서고 있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산이 장도다.

명나라 진린장군과 조선 이순신장군의 수군과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과 해전을 벌였던 장소다.

 

*장도해전은

*1598년 음력 10월 3일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이 왜교성을 공격했다.

*조선 수군은 장도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일본군 3,000명을 무찔렀다.

*그러나 명나라 전선들은 피해를 입었고 8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조선수군은 130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왜군에 포위된 명나라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이 전사했다.

 

장도는 주변이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해상전투의 장면을 그려내기는 어렵게 되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량해전을 틈타

*왜교성을 빠져나와 여수만을 돌아 남해를 돌아서 달아났다.

 

그렇게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천수기단에서 본 성 상단부

 

 

 

다른 문으로 나온다.

 

 

 

숲길을 걸어 나온다.

 

 

 

주차장에서는 이순신 사당인 충무사가 보인다.

시간이 늦어서 다음기회에 가는 걸로

 

.

 

.

 

.

 

길 위에 서 있을 때

 

2022. 11. 11.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현장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