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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파란 곤룡포를 입은 태조 어진이 왜 전주에?

by 솔이끼 2018. 10. 15.

 

2018. 9. 22.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성당 건너편에는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慶基殿)은 경기도(京畿道)에 있어야 되는 데? 경기전 앞은 광장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매표를 하고 안으로 들어선다. 홍살문이 서 있다. 문이면서 문이 아닌 문. 그냥 마음을 가다듬으라고 알려주는 문. 마음을 바로하고 홍살문을 지난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신 곳이다. 태종 때인 1410년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웠다. 세종 때인 1442년에 경기전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경기전은 광해군 때인 1614년에 새로 지어졌다. 사적 제 3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돌이 깔린 홍살문을 지나고 또 문을 지난다. 정전이 나온다. 보물 제 15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네모진 마당에 꽉 찬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엄숙한 기분이 느껴진다. 정전 안에는 태조 어진이 모셔져 있다.

 

정전 안 닫집 아래 모셔진 태조 어진을 본다. 파란 곤룡포를 입었다. 왕은 붉은 옷만 입는 줄 알았는데, 조선 초기에는 파란 옷을 입었다는 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현재 어진은 고종 때인 1872년에 새로 그린 것이다. 국보 제 317호다.

 

한 나라를 세운 임금의 초상을 모신 곳을 너무 신격화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왕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 시대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 태조 어진을 전주에 모셨을까?

 

태조 어진은 전주에만 모셔진 것이 아니다. 어진을 모실 당시 옛 수도인 평양, 경주, 개성에, 당시 수도인 서울, 그리고 본향인 전주, 활동무대인 영흥에 모셨다. 6곳이다. 본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주에 태조 어진을 모신 사유가 애매하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 이유는 본인들만 알겠지.

 

경기전 뒤뜰에 있는 전주사고는 생각보다 작다. 그나마 내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큰 나무 아래 쉬었다 간다. 숲이 정갈하다.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본다. 나도 조용히 즐겁다.

 

 

 

 

 

 

 

 

 

 

 

전주 경기전/사적 제 339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으로 태종이 1410년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과, 계림, 평양 등 세 곳에 창건하였는데 1442(세종24)에 완산의 어용전을 경기전이라고 정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에 중건했으며,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 보수가 이루어졌다.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준수된 안정된 구조와 조형 비례로 건축적 품위를 보여주는 건물로 주위 공원, 박물관 건축과 함께 문화시설로 개방되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의 상징인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1410)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경기전은 선조 30(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광해군 6(1614) 11월에 중건됐다. 경기전에는 두 개의 숨은 문화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경기전 정문 밖 도로가에 있는 하마비요, 또 하나는 진전의 거북이 이야기이다.

 

하마비에는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라고 쓰여져 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어서 이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진전에는 거북이가 붙어 있는데, 경기전을 완성한 목공이 그 영원함을 위해 지붕에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올려놓았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가 물에서 살고 진전이 목조건축인 점에서 화재막이용 거북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기전에서 보이는 앞산 승암산이 화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전주 경기전 정전/보물 제 1578

 

사적 제339호의 전주 경기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1442(세종24)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태조어진 국보 제317)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쇠서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있다.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내신문 내의 신로 및 향로의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된다.

 

 

 

 

 

 

 

 

 

 

 

 

 

 

 

 

 

조선 태조어진/국보 제 317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된 어용(御容)은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1442) 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御眞)은 고종 9(1872) 9월에 개화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내장산에 피난하였다가 정읍, 태인, 익산, 용안, 임천, 은산, 정산, 온양, 아산을 거친 다음 강화도 안주를 경유하여 묘향산 별전(別殿)에 봉안되었다. 그후 어용은 여러번의 수난을 겪었는데 즉 인조 14(1636)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으며 영조 43(1767) 이른바 정해대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긴급 피난한 일이 있으며 고종 31(1894)에는 동학군의 전주입성으로 한때 위봉산성에 피난하기도 했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26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것을 1970년 경기전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전체 높이는 2.35미터이다. 예종대왕의 태를 묻은 것으로, 비석전면에 [睿宗大王胎室]이라 새기고, 뒷면에는 [万曆六年十月初二日建]이라 보인다. 선조 12(1578)에 세웠는데, 그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1734)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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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2.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